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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디테일'이 살아있는 나라

[LA중앙일보] 발행 2018/11/30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8/11/29 19:12

요즘 서울 도심을 걷거나 답사하는 모임이 꽤 활발하다고 한다. 조선 500년 수도였던 만큼 역사와 전통이 서린 장소들이 즐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우리의 뿌리, 삶의 원형질을 이제라도 찾아보겠다는 것이니 그만큼 한국이 여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지난 주말 급한 볼일로 며칠 한국을 다녀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일부러 짬을 내어 서울 도심을 걸어 보았다. 덕수궁, 청계천, 인사동, 안국동 일대의 늦가을 정취가 고즈넉했다. 특히 북촌 한옥골목에선 소소한 생활공간까지 이렇게나 많은 이가 찾는 유명 관광지로 바꿔 놓은 기발함에 탄성이 나왔다.

북촌 초입, 옛 풍문여고 터를 지나 덕성여고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는 중이었다. 골목 한 모퉁이에 작은 의자가 있고 그 위에 유리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안내문도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말 못할 고민을 적어 넣어주면 누군가가 상담을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상자 속에는 제법 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정말 이런 곳에도 고민을 토로하는구나 싶어 놀랐다.

삼삼오오 젊은이들로 번잡한 관광지다. 다들 깔깔거리며 즐겁게 오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그중에 삶에 지치고 말 못할 고민에 힘들어 하는 누군가는 꼭 있을 것이다. 그런 누군가를 위해 이런 상자까지 마련해 둔 세심함이라니, 뭉클했다. 소위 '디테일'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온종일 걸으며 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전화기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이 됐다. 난감했다. 전에 편의점에서 급속충전 해 주던 게 생각나 두어 곳을 찾아 가 봤지만 더 이상 그런 서비스는 안 한다고 했다. 마침 관광안내소가 보였다. 외국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헛일하는 셈치고 들렀다.

"혹시 주변에 전화기 충전 해 주는 곳 있을까요?" 에멜무지로 물었는데 뜻밖에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충전해 드릴게요. 30분 뒤에 오세요." 그러면서 접수대장을 내밀었다. 내가 아는 한국은 이럴 리가 없는데 하며 내심 또 놀랐다. 변화된 한국, 정말 '디테일'이 살아있는 나라가 됐구나 감탄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걸었지만 뭔가 답답한 마음은 끝내 가시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잘한 것들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해 놓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빠진 느낌, 그것은 바로 '개성 없음, 특색 없음' 이었다. 번화한 도심은 그렇다 치고 한국 전통 한옥마을이라는 북촌도 여느 관광지의 번잡한 상가 골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음식점도, 카페도, 파는 물건들도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한국 관광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북촌을 내려오며 바라 본 서울 도심은 더 답답했다. 빼곡히 들어선 빌딩 하나하나는 더 없이 세련됐지만 전체로는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원래 서울은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북한산, 관악산, 남산 같은 산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서든 산도 보고 하늘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분별하게 지어진 고층 아파트나 빌딩 때문에 그런 조망은 거의 사라졌다. 산은커녕 고개를 180도 뒤로 젖히지 않는 한 하늘 한 조각도 볼 수가 없었다.

건축가 유현준은 "우리의 미적 감각이 허용할 수 있는 다양성의 한계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서울이 이렇게 엉망이 돼버렸다"고 한탄했다. 아무리 디테일이 강해도 기본이 허물어지면 무용지물이다. 세계 어느 도시도 가지지 못한 풍성한 콘텐트가 넘쳐나는 서울을 걸으며 느낀 안타까움의 실체도 바로 이것이었다.

가수 패티김은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라며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목청껏 찬미했다. 그의 소망대로 다음 세대 역시 아름다운 서울에서 계속 살게 하려면 과거 전통만 자랑하기 전에 무엇을 자제하고 무엇을 간직하며 개발해 나갈 것인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건축가들, 도시계획 입안자들, 이제부터라도 좀 더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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