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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기

박비오 신부 / 천주교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박비오 신부 / 천주교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LA중앙일보] 발행 2019/02/05 미주판 26면 기사입력 2019/02/04 18:52

기원전 1050년경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싸워 크게 패했다(1사무 4-6장). 장정이 4000명 가량 죽었다고 했으니 엄청난 패배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필승의 신념으로 실로에서 '계약의 궤'를 모셔온다. 그 궤는 십계명을 모셔둔 상자로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던 궤였다. 실수로라도 그 궤를 만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만큼 하느님의 현존을 강력하게 품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 궤를 모신 이스라엘 진영은 의기양양해져서 다시 한 번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보병만 3만 명이나 죽을 정도로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 궤를 모시고 온 엘리의 두 아들도 죽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약의 궤만 모셔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그 궤에 주님의 현존이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일까?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죽은 신을 섬겼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전투에서 승리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그 궤를 자기들 진영에 가져갔지만, 그날부터 재앙이 끊이지 않아 결국 그 궤를 이스라엘에 돌려주고 만다. 그만큼 그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강력하게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먼저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프니하스의 행실을 살펴보자. 그들은 사제의 아들로서 경건하게 하느님을 섬긴 게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못된 짓을 골라 했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그들에 대한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계약의 궤'가 창출한 영광에만 집중했다. 그 영광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도출되었는지 망각했다. 광야를 거닐던 모세와 히브리인들이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계약의 궤를 앞세우고 전투에 임했을 때 그 결과가 승리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의탁하지는 않고 계약의 궤 그 자체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복 신앙이었다.

이스라엘은 승리라는 결과가 도출된 과정은 생략하고 그 결과만을 바랐던 셈이다. 이런 믿음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마주할 수 없었다.

마르코복음 1장에 나오는 나병환자를 바라보자. 그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는 예수님의 권고를 무시한 채 치유의 기쁨에 도취하여 자신의 치유를 떠벌리고 다녔다. 본인은 '자신의 행위가 뭐 그리 큰 잘못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행위로 인해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심으로써 그에게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지만, 그분께 되돌아온 것은 바깥 외딴 곳에 머무는 소외됨이었다. 마치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과 같은.

신앙인은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원의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 갖춰야 할 태도다.

park.p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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