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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3·1운동, 미주동포들의 눈물겨운 지원

1931년 3월 1일 하와이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남녀노소 많은 한인들이 참석해 경축행사를 벌였다. [대한인교민총단제공]

1931년 3월 1일 하와이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남녀노소 많은 한인들이 참석해 경축행사를 벌였다. [대한인교민총단제공]

100년 전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얼마나 많은 한인들이 참여했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한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부상당하고 그리고 투옥되는 어려움을 당했을까?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직접 만세 운동에 참가한 한인들이 106만 여명, 사망자가 7509명, 부상자 4만5000여 명, 구속된 사람이 4만7000여 명으로 돼있다.

총독부의 자료이니 물론 실제는 그보다 더했을 것이다. 더구나 구속된 사람 가운데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감옥에서 죽었으며 또 고문으로 감옥을 나온 뒤 평생을 불구로 고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같은 시기인 1919년 봄 마하트마 간디는 사타하그라에서 인도의 독립을 선언하고 봉기했다. 그때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인도인 4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도의 독립운동은 잠시 주춤했었다.



영국군과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비교할 수가 없다. 사망자만 거의 20배에 달했다. 일본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모든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11일이 지난 뒤인 3월 11일에 언론에 흘렸으며 그때에야 비로소 뉴욕타임스 등이 이 사실을 보도했다.

3·1운동을 추진했던 33인은 하와이에서 통역과 목회자로 5년 동안 살아왔던 현순을 미리 상해로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영어로 된 3·1운동 내용을 세계 각국에 보내는 일을 맡아 했다. 현순은 그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의 미주 동포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됐다.

1902년부터 1905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노동자로 들어온 초기 한인들은 조선 말 대한제국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일본에 합병돼 내 나라를 잃은 것이다. 귀국하지도 못한 채 분통이 터져 울부짖어온 그들에게 3·1운동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국민회는 지체 없이 전체 대표회의를 소집해서 독립운동 방침을 정하고 이에 따른 결의 사항을 마련하는 등 빠른 대응 조치를 취했다. 이때부터 초기 한인들은 3·1 독립선언에 기초를 두고 설립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독립자금 지원에 적극 나섰다. 그들은 식구 수에 따라 세금을 내는 인두세를 비롯한 월 연금, 혈성금 등의 명목으로 세금처럼 냈다. 지금같이 은행을 통해 지불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 당시에는 독립자금을 거두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한인들을 만났는데, 일터를 옮겨 만날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주저하지 않고 있는 대로 바쳤다. 심지어 노름방에 가도 있는 대로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돈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쓰이는가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어느 때건 바쳤다.

독립자금은 어려움 속에 있었던 멕시코의 한인들도 참여했다. 그리고 여성들도 함께 참여했다. 1970년대 말에 필자가 취재차 LA에 와서 만난 이화목 여사의 설명이다. "대한인 부인회가 삼일 운동 소식을 듣고 바로 4월 7일에 모였습니다. 각 지방에 계신 부인 41명이 모여서 지금 조국에서는 독립선언이 선포됐는데 우리는 이제 우리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느냐? 그때 우리 생각에 33인은 모두 잡혀가서 곤경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선 그 가족부터 구제를 하자. 그래서 거기서 모금을 해서 1500 달러를 먼저 보냈어요." 1500달러는 지금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필자가 만난 양주원 옹(1977년 당시 99세)의 얘기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뒤에 북간도, 서간도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이 상해로 모두 몰려들었거든. 그 사람들 중에는 임시정부 요원 이외에 학생들도 있었는데 군인들을 포함해서 800명이나 됐단 말이야. 그 당시 중국 땅에서는 중국 사람들의 형편도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밥 한 술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었지. 또 우리나라는 돈을 보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왜놈들이 알면 목을 베거든. 그러니 돈 나갈 데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단 말이야." 800여 명이나 되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과 관련 인사들의 활동비와 생계비 등을 미국의 초기 이민자들이 거의 대부분 지원해왔다는 주장이다.

관련 학자들에 따르면 한일합병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의 초기 한인들은 무려 250만 달러(재미 한인 50년사를 저술한 김원용은 300만 달러 주장)라는 거액을 독립자금으로 바친 것으로 돼있다. 그동안의 물가 상승률 20배를 적용하면 무려 5000만 달러라는 거액이 된다. 초기 한인들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매년 3월 1일에 기념식을 하고 각종 행사를 가졌다. 현순은 자녀들이 쓴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와이에서 부활절이나 성탄절보다 큰 행사가 하나 있다. 이 행사는 라와이 해변에서 거행하는 삼일절 독립기념일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삼일절을 경축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을 경축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사람들은 이날 태극기를 흔들고 연설을 하고 기념행사를 하고 부녀자들은 한복으로 정장하고 남자들은 넥타이로 멋있게 정장하며 젊은이들은 새 바지를 입고 어린 아이들은 구두를 신었다." 그들은 이어 달리기와 배구 등 각종 스포츠 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 함께 식사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같은 3·1절 행사는 한인들이 살고 있는 미국 내 각 지역은 물론 멕시코에서도 매년 3월 1일에 치러졌다.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3·1절을 1주년부터 기념식을 가지면서 기려온 곳은 없었다.

일본제국이 3·1운동의 잔재를 깡그리 없애버린 상황에서, 그 정신을 기리면서 이어 나온 것은 바로 미주의 초기 한인들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의 미주 한인사회가 3·1절을 기리지 않고 그리고 그를 위해 독립자금을 모아 보내지 않았다면, 3·1정신은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라철삼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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