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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별기고] 기미만세사건, 이런저런 이야기들

# 실비치 은퇴마을 레저월드에는 여러 동아리모임들이 있다. 문예반 '글깨동무' 모임도 그중의 하나다. 지난주 모임에서는 남녀 17명 모두가 일제히 일어섰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들고 함께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이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사람의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우렁차고 결단이 넘치는 음성, 비장한 각오가 흐르는 얼굴들이었다. 초등학생들처럼 음성을 맞춰 읽으면서 목이 메고 눈물을 글썽였다.

# 1918년 미션스쿨인 전주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천안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한 처녀가 있다. 지하운동 비밀당원이 되어 천안 지역 책을 자원했다. 만세운동에 목숨 걸고 참여하겠다는 비밀서약도 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비밀조직이 건네준 문서를 가슴 깊숙하게 품고 기차를 탔다. 지방집회에 배포할 선언문이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처녀는 옆자리 손님에게서 아기를 빼앗듯이 안고, 태연스럽게 자기의 젖을 물렸다. 그 교사가 후일 중앙대학교 창설 총장 임영신 박사였다. USC 첫 한인유학생이고 이승만 초대정부에서는 상공부 장관도 지냈다.



# 기미년 만세운동이 수원에서 50리쯤 떨어진 발안읍에서는 3월 31일에 일어났다. 주도한 사람은 유학자 이정근 선생이었다. 필자의 이름과 똑같다. 그분은 3.1 독립가라는 가사도 썼다.

"터졌구나, 터졌구나/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참다/이제서야 터졌구나." 그렇게 시작된다. 전국적으로 불렸던 독립가였다. 발안읍 만세사건은 그 악명 높은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연장된다. 2주 뒤에 제암감리교회 안에 신자들을 가두고 일본경찰이 불을 질러 30여 명을 죽였고 근처 동네 집들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 만세운동에서 가장 참혹했던 이 사건은 발안장터 만세운동 때 일본경찰 한 사람이 민중에게 맞아죽은 보복이었다.

# 일본경찰은 제암리교회 참살사건을 완전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이를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있었다.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로 영국 태생의 캐나다 선교사였다. 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했던 의사 겸 의학교수로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졌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유관순 등을 돌보기도 했고, 잿더미가 된 제암리교회를 카메라에 담아 언론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기미독립운동 '34인'으로 예우하는 기념공원이 한인들의 정성으로 토론토에 마련되었다.

# 삼일절 하면 유관순 이야기를 빼어 놓을 수가 없다. 별처럼 빛나는 순국자였고 순교자였다. 하지만, 모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유관순의 투쟁 공적이 과장되었고, 친일파 여성 지도자들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음모란다. 하나 이 같은 유관순 깎아내리기는 전혀 정당하지 않다.

안성주 장로(LA연합감리교회)의 고모 안인서씨는 유관순과 어릴 적 단짝친구였다. 기미만세사건이 천안에서 있을 때 유관순과 함께 맹활약을 했다.

유관순은 서울로 올라가서 만세운동에 몸을 던지겠다고 고집 부렸다. 안인서씨는 생명안전을 위하여 천안에서 꼭꼭 숨어 지내자며 극구 말렸다. 유관순은 결국 서울로 올라갔고, 순국했다. 유관순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에 참여했다가 생명을 잃었다.

유관순은 '죽으면 죽으리라'며 유대민족을 살려낸 에스더요, 프랑스를 구출해낸 잔다르크라 해도 손색이 전혀 없다. 더 위대한 것은 부모와 딸 그러니까 가족 전체가 독립국가 회복에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이정근 / 성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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