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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별기고] 외할머니가 들려준 '애국지사 한영수'

100년 전 외할머니의 큰 오빠인 한영수 지사(외외종조부)는 28살이었다. 당시 5살이었던 8남매의 다섯째인 외할머니에 의하면 1919년 3월11일 평택읍내에서 외외종조부는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갔다.

외할머니의 어머니인 외증조모는 피투성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외종조부를 찾아내셨다. 고깃간에서 고깃덩어리를 찍어서 걸어두는 쇠갈고리에 머리 뒤통수를 찍혀서 순사에게 끌려온 아들을 보신 외증조모는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고 누비 고쟁이를 입고 간신히 엄마를 따라간 외할머니도 정신을 잃으셨다.

당시 평택읍에서 장날인 3월11일 오후 5시경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했고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4월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지만 같은 해 5월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로 감형되셨고, 고등 법원에서 상고기각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고 1920년 1월31일에 출옥하셨는데, 재판과정에서 "조선 민족으로 정의 인도에 기초하여 만세 의사를 발동한 것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상고 이유로 당당히 밝혔다고 법원 기록에 남아 있다.



외종조부는 평양에서 조선은행(현재 한국은행) 행원이던 외증조부 한봉석씨와 이씨 부인 사이에 1891년에 태어나셨던 외외종조부 때문에 외증조부는 은행에서 쫓겨나 장사하시다가 그것도 망하고 가세가 기울었는데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만 들으시면 한겨울에도 따뜻한 방에서 주무실 수 없다고 마루방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에 따르면 외외종조부가 해질녘에 집에 불쑥 나타나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밥하랴 국 앉히랴 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꼭 한밤중에 뒷산에서 흰옷을 입은 동지들이 여러 명 집으로 오기 때문이었단다. 사랑에서 밥 먹고 수군대던 사람들이 외할머니가 아침에 일어나면 다 사라지고, 며칠 있다가 주재소에서 일본 순사들이 몰려와서 "아무개 왔지?" 하면서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천장까지 칼로 북북 그어대면서 온 가족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걸핏하면 수원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독립군이 외외종조부였는데 아버지 장례가 치러지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산소에서 처절히 울면서 "왜놈들은 머지 않아 망한다"고 피 토하듯 울부짖으셨다.

결국, 해방이 몇 년 안 남은 1939년에 돌아가셨는데 수의를 입혀드리면서 염을 하려고 했는데 두개골이 탁 갈라졌다. 아마 3·1 운동 때 순사에게 쇠갈고리로 찍혀서 그렇게 되신 것이라고 외할머니는 얘기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나라는 꼭 독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아비가 독립투사였다면서 그 사실을 내세우거나 그걸 빌미로 구걸할 생각은 말라"고 무섭게 이르셨다.

자손들은 유지를 받들어 독립유공자 신청도 안 했지만 이승만 대통령 시절만 해도 경기도 지사가 외외종조부 묘지에 꼭 참례를 하고 경기일보에 '애국 지사 한영수'에 대한 기사도 났다고 외할머니는 생전에 말씀하셨다. 결국 외외종조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받으셨다.


김해원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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