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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삼베적삼 일곱 근'

박재욱 법사 / 나란다 불교아카데미
박재욱 법사 / 나란다 불교아카데미 

[LA중앙일보] 발행 2019/03/05 종교 29면 기사입력 2019/03/04 19:07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어느 스님이 조주(중국 778-897) 선사에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당돌한 질문이다.

만만찮은 공안이라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승사상에 부합하고 설득력 있는 주석들을 전거로 삼았다.

'만법'이란 그 '하나'에서 비롯되어 규정되는 차별된 모든 현상, 인식된 모든 현상을 의미한다.

만법이 돌아가는 그 '하나'는 어디인가.

불법(佛法)을 만법이나 제법이라고도 한다. 만법이나 제법은 불법의 현현이며 현신으로, 불법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불법인 연기법은 만법이 인연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실체 없는 공성(空性)임을 밝힌다. 그것을 토대로 만법의 본질적 동일성과 평등한 진실상을 밝혀, 그것의 근본인 '마음'으로 깨닫도록 한다.

'마음'은 연기적 조건에 기대어 있는 만법이 돌아가는 그 '하나'이다. 인식된 모든 현상의 근원이고 환원, 귀착되는 공성인 청정한 '한마음'이다.

대승의 화엄경은 '모든 것은 마음이 조작한 것' '만법은 일심이며 일심이 만법'이라 창도한다.

여기서 일심(一心)은 대립과 차별을 떠난 평등한 마음, 본래로 청정한 성품인 진여(眞如)를 일컫는다.

만법은 본질이 일심이며, 그 작용에 의해 천차만별의 분별로 전개되는 인식과 반야지혜로 성립되는 심법이다. 따라서 만법은 근원적 '깨달음'의 장(場)인 일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일심인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머물면 죽는다. 산송장이다. 죽지 않기 위해 크게 한번 죽어야 한다. 수행으로 백 척 장대 끝에 서는 일도 대단하지만, 허공으로 한발 내디뎌야 대장부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의 역할은 만법의 차별세계(사바)로 돌아가, 깨침의 발현인 지혜와 자비로 중생 구제라는 위대한 보살도를 실천, 회향해야 한다. 완성될 수없는 완성인 깨달음은 비로소 완성된다.

중생 없는 세계에 부처의 존재이유는 없다.

글머리 물음에 대한 선사의 응답이 짜장, 생뚱맞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베적삼을 한 벌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지."

선사들은 때로 부처란 무엇인가라고, 따지듯 묻는 제자에게 '뜰 앞의 잣나무'니 '똥막대기'니, 천하에 불경스러운 동문서답을 무심히 내뱉는다.

잣나무나 똥막대기 역시 본질이 일심임을 깨치게 한다.

또한, 논리나 분별, 시비, 개념적 알음알이에 매몰되어 있는 제자의 인지를 해체해, 남이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금, 여기'의 일로 돌아가라는 경책이다. 부처되는 '자기일'로 돌아가라는 반야의 철퇴이다.

그럼에도 '똥막대기'만 붙들고 있는 이들이 적잖다.

그럼에도, 어찌 이 무지렁이는 여태 '삼베적삼'만을 저울에 달아 재고 있는가. 은산철벽 앞에 되처 가부좌를 튼다. "이 뭣꼬!"

musagu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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