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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보리피리 불며 "필 닐니리"

김용현 / 언론인
김용현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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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19/03/12 미주판 23면 기사입력 2019/03/11 18:39

3월 이맘때 쯤이었다. 미국에 오기 전 어느 해던가 방송국에서 신춘 특집을 만들기 위해 부평으로 한하운 선생을 만나러 갔었는데 선생은 봄볕이 따가운 툇마루에 앉아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 진단받은 나병의 재발로 직장을 그만 두고 남하해서 평생을 병과 싸우며 시인과 걸인으로 살아가고 계셨다. 한하운 선생은 그때 육성으로 '보리피리'를 낭송해 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들어 주셨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필 닐니리." 선생의 목소리는 둔탁하고 쉬어 있었지만 가누기 어려운 슬픔이 배어있었다. 그러고 나서 5년 뒤에 한하운 선생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세먼지 속에서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지금 한국의 섬진강 유역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란다. 한하운 선생이 그리워했던 '꽃 청산'이라도 재연하려는 것일까. 지난해보다 매화는 1주일 정도 빨라져 3월 17일까지가 광양매화축제의 절정이라는데, 하동에서 광양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자락을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주변에 꽃구름처럼 펼쳐진 매화꽃이 눈에 선하다.

남가주에도 어느 해보다 풍족하게 내린 비로 사막이나 어디서나 초목들이 봄을 전하기에 경쟁에 나섰다. 앤틸롭 밸리를 중심으로 4월에나 만개하던 파피 꽃도 어느새 동산을 덮었고 내가 자주 찾는 사우스코스트 보테닉 가든에는 매화에 이어 벚꽃이 한창이다. 어디 그뿐이랴, 가든의 오솔길을 따라 양옆으로는 물을 흠뻑 들여 마신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들이 싱싱하다.

이렇듯 봄은 강산을 뒤덮고 있건만 춘래 불사춘인가, 세상에는 봄이 거꾸로 가고 역사도 퇴보하고 있는 듯한 소식들로 가득하다. 평화의 봄이기를 온 민족이 그렇게 바랐는데, 하노이선언이 무산된 이유가 미국 국내정치의 유, 불리 판단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정황이 전해지면서 동맹국에 대한 서운함 이전에 민족의 고달픈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이 봄을 또 쓸쓸하게 만들고 있는 일은 5·18 민주혁명이 있은 지 39년을 맞고 있는데 아직도 그날 학살의 주역 전두환 씨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처참하게 농단한 죄과로 대통령 직에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마디 뉘우침도 없는데 어느새 사면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다. 역사의 죄인들은 그때 단죄를 못하고 나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한때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통일 운동의 큰 나무이셨던 문동환 목사님의 부음을 듣는다. 그렇게 원 하셨던 민족의 통합을 못 보시고 떠나신 게 가슴 아프다.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 미국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주셨을 때 옆에서 모셔 본 목사님은 외롭고 힘든 사람에게는 너무나 따뜻한 분이셨다.

미국에서 편하게 목회자의 길을 걸으실 수 있는 기회가 많았는데도 목사님은 언제나 민초들 편에 선 '떠돌이 목자'로 당신을 낮추셨다. 자서전의 부제도 '떠돌이 목자의 노래'다. 일제 강점기 북간도에서 태어나신 목사님은 남한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시 한국으로 그 자신 떠돌이처럼 다니시며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난 떠돌이 백성들을 보듬는 눈물의 한평생을 보내셨다.

떠돌이 목자 문동환 목사님과 유랑시인 한하운 선생의 공통점이 있다. 그분들은 소외된 인간을 한없이 사랑했으며 끝내는 그들의 봄을 믿었다는 점이다.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필 닐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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