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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후손 현주소, 어묵장수에서 청계천 걸인까지

[조인스] 기사입력 2008/10/11 21:05

[월간중앙 독점추적] 태조 이성계 사후 600년, 조선의 황손으로 산다는 것

의친왕의 후손들이 의친왕 5녀 이공 씨의 <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를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1.이혜원(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2.이일주 3.이석 4.이원(황사손) 5.이공 6.故이구 7.이진 8.이찬 씨 9.이석주 한림대 교수.

의친왕의 후손들이 의친왕 5녀 이공 씨의 <나의 아버지 의친왕> 출판기념회를 맞아 한자리에 모였다. 1.이혜원(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2.이일주 3.이석 4.이원(황사손) 5.이공 6.故이구 7.이진 8.이찬 씨 9.이석주 한림대 교수.

2005년 7월24일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의 영결식에서 황사손 이원 씨.

2005년 7월24일 마지막 황세손 이구 씨의 영결식에서 황사손 이원 씨.

“일본이 조선 황제의 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시중 드는 내시나 상궁들을 하나둘 궁 밖으로 쫓아내 버렸어요. 이들이 궁에서 멀리 가지 못하고 궁궐 부근에 둥지를 튼 것입니다. 음식점·한복집·떡집 등 궁녀 출신 주인이 경복궁 주변에 더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9월 초순 경복궁 근처 한정식집에서 만난 이혜원(53·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씨가 건넨 말이다. 이씨는 고종의 셋째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13남9녀 중 9남 이종의 장남이다. 이씨는 조선 황손 중 한 명으로 어릴 때부터 집안어른들로부터 궁궐이나 황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의 말대로 행정구역상으로 통의동에 속하는 경복궁 건너편 백송정길 골목에는 한 집 건너 한 곳씩 오래된 한정식집이 있다. 서울 길거리에 남아 있는 조선 왕조의 희미한 흔적이다.

이씨는 4년 전 '관광 매거진'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친왕 후손들의 가계와 가족사를 정리하고, 황실의 생활·문화사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분석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 꿈길같이 아득했던 황세손의 노제

문화재청은 이씨가 황손으로 궁궐 내 사정을 파악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 등을 감안해 2005년 그를 연구자문위원으로 불러들였다. 요즘에는 ‘조선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유네스코 실사를 앞두고 실무를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무엇보다 황실의 후손으로서 조선의 역사를 알리고 보존하는 일을 맡아 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죠. 곧 조선 역사책 발간도 준비 중입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황사손으로 추대된 이원(47) 씨. 그는 의친왕의 10남 이갑 씨의 아들이다. 그도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샐러리맨에 불과했다. CJ홈쇼핑 부장으로 있다 하루 아침에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적 대통을 잇게 된 것. 그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 씨가 후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황사손’이라는 명예에 앞서 인간적 고뇌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기자와 마주앉은 그는 이구 황세손의 장례식 이야기부터 꺼냈다.“2005년 7월24일 열린 이구 저하 영결식을 못 잊습니다. 그때가 아마 십 수년 만에 찾아온 가장 무더운 날이었을 거예요. 왕실 장례 격식에 맞춰 7겹인가 9겹짜리 삼베옷을 입고 며칠 밤낮 조문객을 맞았는데, 제가 살아 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생사를 넘나드는 심정이었어요.”

영결식이 열린 창덕궁 희정당 앞에는 1,000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는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은 물론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영결식이 끝난 직후 열린 노제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창덕궁-돈화문-종로3가를 거쳐 노제가 치러진 종묘까지 가는 동안 그는 더위와 약해진 체력으로 인간적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안경 사이로 눈물인지 땀이지 분간할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행사에 참석한 전주 이씨 며느리들과 여자들은 일사병으로 픽픽 쓰러지기도 했다. 휘청대며 걷는 그의 귓가에 “왕이래” “이원이래” “이구 아들이래” 하는 시민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머리부터 계속 땀이 쏟아져내려 눈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죠. 바로 앞 사람의 구두 굽만 보고 따라갔죠. 황실이고 조상이고 제 인간적 고통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습니다.”

꿈길처럼 아득하고 뜨거웠던 아스팔트 위의 노제를 끝내고 종묘에 모신 이구 황세손 상청 앞에 다다르자 그의 설움은 극에 달했다.

“엎드리자마자 ‘억’ 하고 설움이 복받치더라고요. 일본땅에서 외롭게 살다 가신 이구 저하를 위해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제 인생에 대한 무한한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누르더군요.”

이씨는 영결식 이후 27개월 동안 이구 황세손의 상청이 있는 창덕궁 낙선재에 가서 3년상을 치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상주로서 부인을 대동하고 직접 제례를 올렸다. 낙선재는 그에게 개인적으로도 어렴풋한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 의친왕 아들 이석 가수로 활동

“열아홉 살 때로 기억합니다. 영친왕 비인 이방자 여사가 그곳에 사실 때 제가 미국으로 유학간다고 인사하러 갔었습니다. 44세에 다시 찾았으니 25년 만이죠. 제가 상주로서 이구 저하의 3년상을 치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낙선재의 겨울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추웠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이씨는 이를 부딪칠 정도로 몸을 떨면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제를 올렸다. 양말을 세 겹 네 겹 신어도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3년상을 치러내면서 ‘도대체 이 의식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가치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낙선재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갔어요. 낙선재는 대한제국 시절 가장 불행했던 조선 황족들이 기거했던 곳 아닙니까?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일본에 볼모로 갔다 정신병을 얻어 돌아온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모두 그곳을 거쳐 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명할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쳐 오르더군요.”

이씨는 서울에서 상문고를 졸업한 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NYIT(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방송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마치고 미국 케이블회사인 HBO에서 PD로 일하던 그는 6년 만에 귀국해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에서 5년 동안 광고 제작 업무를 맡기도 했다. 결혼 관련 케이블 채널인 뷰티TV의 설립 멤버로 참여하기도 했고, 댄스그룹 H.O.T가 한창 인기 있을 때는 관련 캐릭터사업을 벌이는 등 늘 트렌드의 최첨단에서 살았다. 그런 그에게 한국의 역사와 황실의 문제는 진작부터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책 외에는 공부한 적이 없었어요. 황사손이라는 직함을 받고 3년상을 치르고서야 내가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이 생기더군요. 정체성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요? 지난 3년 동안 <조선왕조실록>도 다시 읽고,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죠.”

그는 현재 황실의 4대 제향- 조경단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건원릉기신친향례-의 초헌관(제사지낼 때 첫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맡고 있다. 3~4시간 이상 걸리는 이 제례 의식이 더 이상 그에게는 낯설지 않다. 오는 10월에는 황실문화를 본격적으로 복원하고 알리기 위한 ‘대한황실문화원’(가칭) 설립도 준비 중이다.

광복 직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 고종 직계(순종·의친왕·영친왕) 왕족의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됐다. 고종의 후손들이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크게 사업으로 성공하거나 재산을 모은 후손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년에 영친왕 비 이방자 여사가 살던 창덕궁 낙선재 쪽에서는 늘 생계비 부족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살아 있는 고종 직계 황손으로는 이구 황세손이 사망한 이후 의친왕 계열만 남았다. 이들 대부분은 몰락한 왕조의 ‘황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의친왕은 생전에 13남9녀를 남겼고, 이 가운데 생존 아들로는 11남 이석(67) 씨와 이환·이정 씨가 있다. 이 중 이석 씨만 한국에 거주하고 나머지 두 아들은 미국에 살고 있다.

이석 씨는 창경초교와 경동중·고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를 졸업했다. 샌디에이고 김병묵 한인회장의 초청으로 1979년 도미했다가 1989년 귀국했다. 2004년 10월부터 전주에서 만들어준 150평짜리 한옥 ‘승광재’에서 전주황실문화재단을 만들어 황실살리기운동과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하고 있다. <비둘기집>이라는 노래로 대중에게 익숙한 이석 씨는 지난 8월초부터 <아! 숭례문>이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내고 다시 가수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월간중앙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아무리 주변에서 과거를 잊고 살라고 하지만 ‘황손’이라는 정체성은 과거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굴레”라고 토로했다.

잠시 이미 사망한 의친왕 아들들의 삶을 돌아보자.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은 1947년 10월 일본인 모모야마 겐이치로 귀화해 한국과 인연을 끊었다. 1991년 숨진 그는 자녀를 3명 남겼으나 소식이 끊긴 상태다.

황실의 범위 =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금의 적자(嫡子) 자손은 4대손까지, 서자(庶子) 자손은 3대손까지를 종친으로 대우해 군(君)으로 봉했다. 황실의 친족적 범위는 황제를 기준으로 10촌 이내의 가까운 근친으로 보았다. 조선시대에도 황실 종친부를 구성하는 10촌 이내까지 황실로 규정했다.

- '나의 아버지 의친왕' 쓴 이공

둘째아들 이우는 조선 왕실 사람들 가운데 드물게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운현궁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해 ‘공’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았다. 일본 황족이나 화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한국인 박찬주 여사와 결혼했다. 1945년 6월 일본 육군 중좌(중령)로 진급해 일본 본토 전출을 명받고 8월6일 말을 타고 히로시마를 지나다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 숨졌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우의 큰아들 이청 씨는 운현궁을 서울시에 팔고 평창동에 살고 있다. 요즘 석파학술연구원 운영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온 인재로 이승만 대통령이 양자로 달라고 요청했다 거절당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양녕대군의 17대 손으로 적통 왕가의 후손이 어떻게 양녕대군 후손의 양자로 들어가느냐가 거절 이유였다.

3남 이방은 후손 없이 1951년 폐렴으로 숨졌다. 친족에게 알려진 바로는 왕궁이 싫어 청계천 밑에서 걸인들과 생활하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한다. 4남 이창 역시 서울 상도동에서 어묵장사를 할 정도로 힘겹게 살다 사망했다. 5남 이택은 장면 총리 시절 구황실재산관리사무총국장을 지냈다. 1979년까지 청와대 옆에 있는 칠궁에서 11남 이석 씨와 함께 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쫓겨날 처지에 놓이자 화병으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친일 이재극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고, 그 덕분에 자손들이 벌이는 땅 찾기 소송이 ‘친일파 땅 찾기 소송’으로 명명돼 이따금 신문 지면에 실리기도 한다. 6남 이곤은 장면 정부 때 국회의사당 도서관에 근무했다. 그는 청량리에 있는 홍릉 제실에서 살다 1984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이준 씨는 현재 서울의 의료기회사 중역으로 있다.

7남 이광은 194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란갔다 1952년 해운대에서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익사했다. 8남 이현은 평생 수원의 평화수녀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독신으로 살았다. 1996년 2월17일 수원시 장안구 평화양로원에서 숨졌다. 10남 이갑 씨는 미국에 생존해 있다. 그의 아들 이상협(45) 씨가 지난해 황사손으로 추대된 이원 씨다.

의친왕의 딸 9녀 중 생존한 이는 7명이다. 1녀 이영과 4녀 이숙은 사망하고 5녀 이공, 8녀 이현, 9녀 이민은 미국에 거주한다. 2녀 이진, 3녀 이찬, 6녀 이장은 서울에, 7녀 이용은 남미에 거주 중이다.

이 중 5녀 이공 씨는 컬럼비아대학교 한국학사서과장에서 은퇴해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현재 할아버지인 고종 황제 시절 만들어 놓은 최초의 주한 미국공사관을 되찾기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일본은 강점 시절 이 공사관을 사유 재산화해 단돈 5달러에 미국의 한 교수에게 강매했다.

[월간중앙 10월호]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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