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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우리 역사 속의 러시아

[LA중앙일보] 발행 2019/04/26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04/25 20:40

#.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졌다. 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광활한 시베리아를 개척한 덕분이다.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러시아는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 제국이 되었을까.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1582년부터 시작됐다. 예르막이란 사람이 이끄는 800여 명 코사크인들이 우랄산맥 부근 시비르(Sibir) 강을 건너면서부터였다. 시베리아라는 이름도 시비르강에서 비롯됐다. 러시아의 동진을 부추긴 것은 모피였다. 담비, 수달, 밍크 같은 동물 모피는 겨울철 유럽 귀족들에겐 필수품이었다. '부드러운 금'으로 불릴 정도로 가격도 비쌌다. 러시아 상인들은 모피를 구하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해 동으로 동으로 내달렸다. 가난한 농민, 범법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자들이 뒤를 뒤따랐다.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도 따라왔다.

당시 중국은 명(明)을 멸망시킨 청(淸)이 한창 팽창하고 있을 때였다. 양국의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청은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왕은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이었다. 효종 시대의 화두는 북벌(北伐) 이었다. 아버지 인조의 치욕과 자신의 인질 생활 수모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를 키웠다. 청나라는 이미 조선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북벌론은 효종 치세 내내 사그러들지 않았다. 국내 정치용이었다는 말이다.

효종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청을 치기 위해 조련한 병사들을 오히려 청을 돕기 위해 보내야 했다. 1654년 150명, 1658년 260명 등 두 차례에 걸쳐 조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와 연합해 흑룡강(아무르강)에서 러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나선정벌'이라 명명된 우리 역사상 러시아와의 첫 대면이었다. 나선(羅禪)이란 러시아 사람(Russian)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 200년 뒤인 19세기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열강이 됐다. 중국이 서구 제국들로부터 침탈당할 때 러시아는 연해주를 챙겼다. 1884년엔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조선에도 진출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 야욕이 노골화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을미사변) 오히려 친일 세력을 더 키웠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8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아관파천) 1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각지의 삼림 채벌권, 광산채굴권 등 이권을 침탈했다. 하지만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일본에 무릎을 꿇고 러시아는 조선에서 물러갔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는 소련(소비에트연방)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소련은 1945년 종전과 함께 북한에 진주했다. 6·25땐 북한 편에 섰다. 여기까지가 과거 역사 속 러시아다.

#. 내일(4월 27일)은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1주년이다. 기념은 해야 하는데 잔칫상에 올릴 과일이 마땅치 않다. 북미협상 교착으로 딱히 맺힌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김정은 위원장이 꺼내 든 카드가 블라디보스토크 북러정상회담이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청-일 각축을 틈타 조선에 발을 들이밀고 각종 이권을 챙겼다. 지금 한반도 정세 속에서도 러시아의 노림수는 그때와 비슷해 보인다.

러시아의 등장으로 비핵화 셈법은 더 복잡해졌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달려온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모호해졌다. 급기야 6자회담 얘기까지 다시 나온다. 한반도 평화의 길은 풀릴 듯 풀리지 않는 고차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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