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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봄 이야기

신호촐
신호촐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04/29 19:19

봄, 봄이 왔다. 따뜻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봄!

눈 속에서 기지개도 펴지 못한 뒷뜰에도 따뜻한 봄내음이 수채화처럼 은은하다. 연보라색의 라일락, 노란 개나리, 곱게 머리 틀어올린 난장이 보라색 꽃무덤, 봄은 꽃이어서 사랑스럽다.

지난해 늦가을 보라색 난의 구근을 뒷뜰 나무 주변에 옮겨 심었다. 그 위에 흙을 다지고 돌멩이를 얹어놓았다. 나는 매해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돌아오는 봄에 피어날 꽃들을 기대하며, 그때마다 다람쥐는 용케도 그 자리를 찾아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숨기고 찾아내고 파묻고 또 파헤쳐지는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그 놈의 먹이로 족히 수십개의 구근은 사라졌을 것이다. 이 땅 위에 피울 보라색 꽃들의 한을 머금고 말이다.

그러나 올해는 좀 달랐다 나는 숨겼고 그는 찿지 못했다. 이곳 저곳 긴 잎사귀를 내밀고 "나 여기 있어요" 봄바람에 손짓하고 있다. 그 위 대궁이로 층층의 꽃망울이 터져 손에 묻을 듯 짙은 보라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하다. 봄의 기쁨이었고 오래 기다린 꽃들의 승리였다.

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던 기억이 난다. "뒷뜰에 가 개나리 가지를 꺾어 오너라." 그 때 나는 회초리를 고르려고 이 가지 저 가지를 휘적이며 다녔다. 축 휘어진 개나리 가지마다 노란 꽃들이 줄지어 피어있었다. "나를 꺾지 마세요." 뾰족한 입을 모으며 애원하는 소리에 빠져 방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어머니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도 따뜻한 봄이었고 소리 없이 찾아드는 행복이 있었다.

"기다림이지요."
"미국에 와서 배운 게 있다면 말해주겠니?"
"기다림이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시카고에 왔다. 그리고 45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의 사랑도 꿈도 나의 절망도 행복도 늘 견뎌야 했고 늘 기다려야 했다. 긴 겨울의 혹한 속에서 봄을 기다려야 했던 꽃들처럼 말이다.

꽃은 심기워진 그곳에 꽃을 피운다. 꽃은 오래 인내하며 속으로 속으로 소리 없이 울음을 삼킨다. 날마다 조금씩 자라나며 저마다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꽃은 불평하지 않는다. 추워도 목말라도 견뎌내는 기다림이 있다 심기워진 그 자리가 행복하다 생각했고 땅속 캄캄함이 오히려 꽃을 피우기 위해 소중한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꽃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충실히 겹겹의 꽃잎을 만들어갈 뿐... 달빛 아래 연분홍 라일락 꽃더미. 진한 봄내음 바람에 묻어 흐른다.

"기다릴 수 있나요?"
"용서할 수 있나요?"
"사랑할 수 있어요?"

"네.."라고 대답할 수 없는 부끄러움. 얼마를 더 기다려야 얼마를 더 용서하고 사랑해야 대답할 수 있을까?

봄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배우게 한다. 봄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법을 보여준다. 삶의 벼랑 끝에서도 꽃피우는 여유를 가르쳐준다. "행복은 멀리서 오는 게 아니야 바로 네 옆에 있어."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하는 봄이 왔다. 꽃들이 뒷뜰 가득 내 옆에 왔다. (시카고 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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