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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4·29 폭동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1992년 4월 29일에 일어난 폭동으로 LA는 큰 혼란에 빠졌다. 로드니 킹 판결에 분노한 흑인들의 시위가 극렬해져 결국 방화와 약탈을 동반한 폭동으로 바뀌면서수십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사업체가 피해를 보았다.

LA폭동이 있기 60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는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한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전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한 청년이 일어나 단상을 향해 어깨에 메고 있던 물통을 힘차게 던졌다. 단상에 정확히 떨어진 물통은 특별히 제작된 폭탄이었다. 그 폭탄으로 인해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이 즉사했고, 제3함대 사령관 등 고위 군인들이 중상을 당했다. 폭탄을 던진 청년은 독립을 위해 생명을 걸었던 윤봉길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독립운동의 불을 지핀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세계인들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1992년 4월 29일, LA폭동이 일어난 곳에는 연기가 가득했다. 그 연기는 인종 갈등이 만들어낸 상처로 피어난 연기였고,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우리의 꿈이 불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일어나는 연기였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훙커우 공원에도 연기가 가득했다. 그 연기는 꺼져가던 독립운동이라는 심지를 새롭게 불태우며 나는 연기였고, 잃어가던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연기였다.



윤봉길 의사는 거사 직전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시계와 김구의 시계를 맞바꾸자고 했다. 이유를 묻는 김구에게 윤봉길은 말했다. "제 시계는 6원짜리 좋은 시계고,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데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쓸 수가 없으니 바꿉시다."

한 시간 후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기에 자신이 굳이 좋은 시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백범 김구는 윤봉길의 새 시계를 평생 품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계 안에는 윤봉길 의사의 나라를 향한 사랑이 담겨 있었고, 뜨거운 애국심과 따뜻한 동지애가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의 시계는 그해 4월 29일, 그때의 순간을 간직한 채 등록문화재 441호로 남아있다는데, LA 폭동이 일어난 그해 4월 29일을 기억나게 하는 시계는 어디에 있을까?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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