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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역사적 인물 평가의 딜레마

때아닌 역사전쟁으로 한국이 시끄럽다.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와 싸웠으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독립투사들을 국가적으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세 명을 개인적으로 꼽으라면 김원봉, 홍범도, 김무정이 떠오른다. 영화 '암살'로 조명을 받은 김원봉은 한국 현정부가 지대한 관심을 쏟는 독립운동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등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조직인 의열단은 이미 군사정권 시절에도 국사책에 서술될 정도였다. 홍범도 장군은 김원봉과 김무정과 달리 이름 뒤에 장군을 붙여도 논란이 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최초로 일본군을 격퇴한 봉오동 전투의 주인공이다. 노비의 자식이란 출생 신분, 조선 최고의 포수들을 이끌고 신출귀몰했던 그의 무용담은 영화로 제작하고 싶은 욕구가 넘치게 한다. 김무정은 중국공산당의 대표적 한인 공산주의자로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에 참여했고, 중국인민해방군 포병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포격술의 천재였다.

이 세 사람은 똑같이 사회주의 공산주의계열인데 언제 죽고, 해방 이후 뭘 했느냐에 따라 대우가 확연히 틀려진다. 홍범도 장군은 소련 공산당과 한 배를 탔던 공산주의자였지만 그는 해방되기 전 사망했고, 말년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동포사회를 돌보며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논란이 적다. 김무정은 해방 뒤 김일성 정권수립에 큰 역할을 한데다가 한국전쟁 때는 사단장, 군단장을 하면서 총부리를 직접 남쪽에 대고 쏴 댔기 때문에, 그의 독립투쟁 경력은 향후 오랜 기간 동안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김원봉의 경우는 홍범도 장군, 김무정과 달리 어떻게 취급을 해야할 지가 아주 애매하다. 독립투쟁 막바지 그는 분명히 우익으로 분류되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부사령관이었다. 월북하게 된 동기도 여러 설이 있는데 자의로만 갔다고 보기엔 어려운 부분도 있다. 거기다 김무정처럼 직접 총부리를 남쪽에 갈겨댄 것도 아니다. 한편으론 김일성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한국전쟁 당시에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로 김일성 정권 유지에 조력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남쪽에서 그를 인정해주기엔 걸리는 부분도 적지 않다. 남북이 안타깝게도 분단이 되는 바람에 생긴 슬픈 일이다.



미국도 남북전쟁 뒤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화합이란 이름으로 그냥 넘어가는 바람에 꺼지지 않는 역사전쟁이 지속돼 오고 있다. 남북전쟁에서 남부는 노예제를 지키려고 싸운 게 아니고 주의 개별적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변질된 내용의 남부 옹호론이 한때 대세를 이룬 적도 있었다. 남북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인 율리시스 그랜트는 도살자이고 술꾼이고 나중엔 부패하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됐다.

실상 그랜트는 뛰어나 전략전술가였고 무능한 장군들 때문에 고생하던 링컨에게 혜성처럼 나타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부패한 정치인 친구들 때문에 재임시기가 부정부패로 얼룩졌다고 욕먹지만 많은 개혁법안을 추진했다. 두 번이나 대통령을 연임할 정도로 국민의 인기가 높았고, 실상 너무 청렴(?)해 대통령 퇴임 후엔 빈털터리가 될 정도였다.


김윤상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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