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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생명의 춤을 추며

그림은 눈으로 그린다. 가슴으로 채색한다. 영혼의 떨림이 캔버스를 울리면 좋은 그림이 탄생한다. 시공을 초월한 생의 절박한 아픔과 고통, 기쁨과 환희가 명화를 탄생시킨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만큼 그릴 수 있다.

눈에 담기에는 너무나 찬란한 오하이오의 봄을,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연인의 모습 그리듯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화랑업에 종사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훌륭한 그림을 접한 연유인가. 남의 작품 파느라 20여년간 붓를 들지 못했는데도 그림 그리는 일이 낯설지 않다. 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다행스러운 것은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늦깎이로 출발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명작(masterpiece•名作)은 대내외적으로 훌륭하게 알려진 작품을 말한다. 영혼의 숨결이 담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감동으로 다가온다. 영혼을 바쳐 그린 그림은 생명이 있다. 명화를 카피 하거나 남의 작품을 본 떠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지만 생명을 불어 넣을 수는 없다. 화가의 영혼은 살아 숨쉬는 생명이다.

프랑스는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최강국가로 유럽문화의 중심국가가 된다. 건축에서는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바로크 건축의 웅대함을 뽐냈지만 미술계에서는 회화부분의 ‘프랑스적인’ 것을 찿기 위해 화가들 사이에 ‘푸생 파’와 ‘루벤스 파’의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푸생과 루벤스는 둘 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는데 누구의 작품을 모범으로 삼아야 할 지 미술의 본질에 대한 논쟁이 격화됐다. 푸생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작품을 모범으로 단단하고 균형 잡힌 그림을 그렸는데 비해 루벤스는 경쾌한 구도와 화려한 색채, 다양한 주제로 명성을 날렸다. 푸생의 그림은 색은 보조적인 역할이고 선이 중요한 반면 루벤스는 역동적인 색채가 화면을 휘감았다. ‘선’과 ‘색채’의 논쟁은 닭과 계란의 논쟁만큼 의미 없다. 선이 마음이 그리는 생의 길이라면 색은 영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표현하는 절망과 눈물의 흔적이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생명의 춤’(1899-1900,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국립미술관)에는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중앙에서 붉은 드레스 입고 춤추는 남녀, 왼쪽에서 흰 드레스를 입고 그들을 바라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오른쪽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주름투성이의 노파가 서 있다

'나는 첫사랑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그린 것이다. 곱슬한 금발의 미소 짓는 여인을 다음에 그렸는데 누구라기보다 만개한 꽃과 같은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맞은편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춤추는 한 쌍을 고통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춤을 출 때 내가 소외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소외되었다.’ 뭉크는 평생을 병약한 몸과 정신으로 고통 받았다. 사랑의 감정이 주는 질투와 불안, 고독의 무게, 세상에 내 던져진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과 공포, 절망에 몸부림친 그의 고뇌가 시공을 초월한 불멸의 명작을 만든다.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생명이 영원하지 않다 해도 소멸과 영생을 통해 예술적 생명성을 노래한다. 내 것이 아닌 것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 나만이 갖는 오직 내가 만들어내는 독창성과 창의력이 시대를 풍미하는 대작을 만든다. 인생은 단 한 번 추는 생명의 춤이다. 한정된 무대에서 넘어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슬프고 힘들어도 생명의 춤은 계속된다. (윈드화랑 대표•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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