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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도광양회'부터 '일대일로'까지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한창이다. 무역전쟁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신냉전은 세계의 패권 경쟁과 연결되어 단시일 내에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말 서울의 한 대학교 재학생인 임명묵씨는 현대 중국을 '덩샤오핑 이전 시대' '장기 덩샤오핑 시대'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로 구분했다. 그리고 현재 시진핑의 중국은 '포스트 덩샤오핑 시대'에 있으며 '장기 덩샤오핑 시대'의 도광양회(韜光養晦)로부터 중국몽(中國夢) 구현으로 정책이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몽 실현의 핵심 사업이 일대일로(一帶一路)이다. 1840년 아편전쟁 패배 이후 중국은 서방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하였다. 1949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새로운 중국을 세웠고,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혁명 원로들은 덩샤오핑을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했다. 덩샤오핑은 우선 대외 관계를 확실히 다지기 시작했다. 1978년 북한 방문을 시작으로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주변국가들과 우호관계를 구축하고 일본을 방문해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관계도 회복하고 중국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10년을 맞이한 1989년에 톈안먼 사건이 벌어졌으며, 1991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됐다. 이에 덩샤오핑은 중요한 담화를 발표했다.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에는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고 지적하며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하였다.



여기에 덩샤오핑은 '24자 전략'을 남겨 장쩌민, 후진타오 시대까지 '장기 덩샤오핑 시대'를 열었다. 이 '24자 전략' 중 하나가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이다. 또한 덩샤오핑 사후 중국은 하나의 최고지도자가 아닌, 7인의 집단지도체제로 이루어진 정치국 상무위원이 통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중국의 도광양회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1996년 대선에서 당선된 리덩후이 대만 총통이 '두 개의 중국'을 주창하였다. 이에 '하나의 중국'을 주창하던 중국은 대만을 향해 무력시위를 전개했다. 그러자 미국은 대만해협으로 항공모함을 급파하였고 중국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1999년 유고 내전에서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중국 대사관에 나토가 오폭하여 세 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어도 중국은 아무런 항의도 못했다. 자존심에는 엄청난 상처가 났고 민족주의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중국 전반에서 '미국식 모델'에 불신이 가득 찾다. 도광양회를 지속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은 서방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모델을 도입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중국의 거대한 인구를 먹여살릴 식량과 안정적인 에너지 자원 공급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안정적인 방안이 바로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시진핑의 '일대일로'이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아프리카의 만성적인 경제난 등으로 워싱턴 컨센서스의 위상은 빠르게 퇴색했다. 그래서 중국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책임을 베이징 컨센서스와 일대일로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베이징 컨센서스와 워싱톤 컨센서스 사이의 충돌이 G2 무역전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선 / 글렌데일 교육구 한국어 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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