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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문주란 꽃이 피었어요"

미국에서 살았던 첫 집의 작은 뜰 모퉁이에서 다시 만난 초록색 기다란 이파리를 가진 문주란. 내가 대구에 살 때인가. 남편의 지인이 제주도 희귀식물이라며 한 포기를 선물로 주셔서 화분에 심었다. 당시 나는 허스키한 목소리의 주인공 한인 여가수의 이름으로만 문주란을 알았다.

베란다에 놓고 1년 후엔가 겨우 꽃을 보았는데, 꽃대에서 조랑조랑 백합같이 작은 꽃이 매달렸다. 이민 오면서 가까운 나의 후배에게 길러보라며 그 화분을 주고 왔는데, 후배는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까지 나를 생각하며 길렀다고 훗날 소식을 전해주었다.

미국에서 처음 설던 집은 우리 부부가 서툰 영어 때문에 언니가 골라준 집을 시키는 대로 밤중에 계약했다. 살아보니 좁기도 했지만 집 앞 중학교 운동장 언덕의 높고 긴 둑이 마주하고 있어 흠이었다. LA에서 방영되는 한국 TV 채널 48번이 안테나에 잡히지 않았다. 물론 한국 신문을 구독하며 소식을 접했지만 고국의 향수를 떨치지 못하던 우리는 종종 LA에서 오시는 친정어머니를 위해서도 그 방송은 필수였다.

1년 사는 동안 운전면허증을 획득한 나는 근처에 새로 이사 갈 집을 홀로 찾아다녔다. 성실한 미국인 CPA를 만나 같이 다니며 찾은 집이 지금까지 살고 사는 우리집이다. 그때 이사를 오며 첫 집의 꽃밭에서 퍼온 한 덩이뿌리 꽃이 문주란이다.



집안엔 가구도 없이 커다란 이민가방에 짐을 담고 살던 때였지만, 긴 세월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던 친정집처럼 뜰을 서서히 만들어 갔다. 넓은 뜰에 심었더니 웬걸 감당을 못할 정도로 퍼져나갔다.

겨울비를 흠뻑 맞은 5월이면 어김없이 우아하게 자태를 뽐냈다. 한 꽃대에서 수십 송이가 피어오른다. 고맙게도 마른 땅에서도 건강하지만 수분 부족이면 꽃은 피워내지 못했다.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제주도 천연기념물인 문주란과 달리 우리 집 꽃은 진짜 백합처럼 꽃송이가 크다. 그래서 영어 이름도 멋들어진 '아프리카 여왕'인가.

올해는 선선한 기후 때문인지 6월에 꽃이 만발하고 있다. 마음이 맑고 새하얀 한복을 입은 여인처럼 도도하게 피었다. 게다가 진한 향기까지 풍겨주니 나는 문주란 앞에서 멍하니 한참 서 있곤 한다. 지난날 그 꽃을 가져다주신 고국의 한 아저씨를 다시 뵙는다면 이 즐거움을 전해 드릴 터인데 희미한 얼굴만 떠올라 아쉽다.

또 가정과를 나와 살림도 잘했지만 손재주도 많던 외사촌 광자 언니가 생각난다. 조화며 생화며 꽃꽂이를 잘하던 분이었다. 살아계실 때 제주에 한번 찾아가 문주란 꽃밭을 함께 걸어 보고 싶지만, 어디 우리 삶이 뜻대로 그리 되는가.


최미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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