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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한인 2세 3세들의 6·25

[LA중앙일보] 발행 2019/06/21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19/06/20 19:28

#.임진왜란과 6·25는 판박이다. 1592년 4월 14일, 왜(倭) 함선 1진 700여 척이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6·25 때도 그랬다. 그날 새벽 삼팔선에 첫 총성이 울리고서야 상황의 위급성을 깨달았다.

경과도 비슷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였다. 불과 두 달 만에 한양 도성은 물론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삼팔선을 뚫고 기습 남침한 북한군도 사흘 만에 서울을 장악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다. 외국 군대의 도움으로 전세를 반전시킨 것도 똑같다. 400년 전엔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다. 6·25 때는 미국이 그 역할을 했다. 휴전 협상 또한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 지지부진한 협상 속에서도 전쟁은 계속됐고 백성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후유증은 더 컸다. 강토는 유린됐고 죽고 다친 사람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우리 역사에 이 두 전쟁만큼 참혹하고 끔찍한 국란(國亂)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 흘리고 수모를 당했음에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내부 분열은 오히려 심화됐고 이념 또한 갈려 싸웠다. 명(明)을 섬길 것인가 청(淸)에 붙을 것인가 명분 다툼에만 열중했고, 반북극우인가 친북용공인가 반목하며 철 지난 색깔론에 붙들려 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 국치였고 지금의 좌파우파 갈등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임진왜란은 외적의 침입이었음에 비해 6·25는 동족상잔이었다는 점이다. 6·25로 분단은 더욱 공고화됐고 남북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확실한 적(敵)이 되었다.

지금처럼 민족이 구분되지 않았을 때 한반도 특히 백제와 왜의 경계는 모호했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계속된 침략과 노략질로 일본은 상종 못 할 외적이 됐다. 만주 북방민족도 그랬다. 본시 민족 구분 없이 섞여 살았지만 잇딴 침략 전쟁을 감내하면서 그들 역시 적대적 타민족이 됐다. 민족의 강토 또한 점점 쪼그라들어 지금의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이젠 그마저 또 반이 되었고 6·25를 겪으며 남과 북은 물리적 경계뿐 아니라 의식의 경계마저 이질화 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남과 북은 과거 주변 어떤 이민족보다 더 먼 사이가 될 지도 모른다.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하지만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가 줄어들면서 북한을 대하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특히 해외 한인 2세, 3세들이 더 그렇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보다는 한국인이자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다중의 정체성을 지닌 세대다. 그들은 분단을 모른다. 1세처럼 향우회, 동창회, 교회 등의 테두리 안에도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담을 넘었고 일체의 경계를 허물려 한다.

1세들이 보기엔 불안하고 마뜩찮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일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이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이념 대립에 휩싸여 있다고 해서 해외 한인들까지 편 갈라 반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해외 한인은 지금 세계에 800만 명이나 된다. 그중 약 200만 명이 미국에 산다.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다. 새로운 역할이 있다. 분단에 따른 민족 분열과 증오, 알력과 갈등을 메우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6·25를 지나봤으면 무력으로 아니 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전쟁 즉시로 그만두어야 할 줄 알아야 할 것이요, 국경을 없애고 세계가 한 나라로 되어야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우리의 생명이란 곧 우주적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6·25 69주년을 맞으며 선생이 주창한 비폭력, 반전, 평화의 정신을 다시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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