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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나의 멘토 스코필드 할아버지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 

[LA중앙일보] 발행 2019/07/12 미주판 21면 기사입력 2019/07/11 19:20

"나는 네가 의과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 지금 한국 사회는 너무 부패해서, 힘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니까." 한국 전쟁이 끝난 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이 암울하고 가난했던 1960년대. 고교 3년생인 나를 불러다가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 부모님 고향인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나 한 살 때 피난을 왔던 나는 외할아버지나 친할아버지의 얼굴은 물론 사진조차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영어 성경공부를 하러 늘 찾아오던 윌리엄 스코필드(석호필) 박사님을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라 불렀었다.

이미 이화여대 국문과에 진학하기로 마음 먹었던 나는 우선 우리 집의 경제 형편부터 설명드려야 했다. 일생을 공무원으로 일하시다가 은퇴한 아버지가 노후대책으로 사들인 과수원의 나무들이 폐경기에 들어서 더 이상 과일을 맺지 못할 것을 알아챘을 때에는 부모님은 이미 2/3의 가격을 지불하신 후였다. 서울로 온 뒤에 아버지는 4~5년을 분노에 쌓인 채 외출이 적었고 가계를 꾸려가는 것은 엄마의 몫이었다. 이런 형편에 의과대학 등록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나는 별로 이과 계통에는 흥미가 없었다.

"내일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올 수 있겠니?" 영문을 모르는 채 부모님과 함께 온 다음날 할아버지는 "제가 후원자를 찾아서 의대 등록금을 모두 책임질테니, 따님을 의과대학에 보내실 수 있습니까?" 라고 내 부모님께 묻는게 아닌가!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던 할아버지의 권유에, 나는 상상도 안 해 본 의사의 길을 택했다. 그런데 정말 큰 변화는 부모님으로부터 왔다. 동대문 근처의 집을 팔고, 불광동으로 이사를 간 후에 부모님은 새로이 만난 건축업자들과 함께 집을 짓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한학기 등록금을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후에 부모님은 더 이상의 도움을 거절하셨고, 마침 홀 엄마와 사는 급우에게 그 혜택을 돌릴 수 있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의대 생활 동안 나는 늘 잠이 모자랐고, 코피를 많이 흘렸지만 즐거웠다. 연애에 빠져들고 인턴 과정을 돌며 결혼을 했고, 원주에서 내과 수련을 받으며 첫딸을 낳았다.

올해는 정신없이 떠나왔던 서울에 가서 현충원을 찾아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브란스 종합관에 할아버지의 흉상이 세워지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보탤 수 있었던 것이 나의 죄책감을 조금은 덜어주었다. 애국지사의 묘, 구역 94번에 할아버지의 무덤과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그는 다른 대한민국 애국지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계셨다. 만세 운동 당시 세브란스 병원 약학과에 계시던 이갑성 옹의 부탁을 받고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만세 장면들을 촬영했을 뿐 더러 수원 근처에서 일본 경찰들이 밖에서 문을 잠근 채 한인들이 예배보던 교회에 불을 지른 사건들을 모두 기록하셨다. 구두 밑창에 필름을 숨겨 가지고 나가 온 세계에 일본인들이 주장과 달리 한국인은 미개인이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 자주 국민임을 알려 주셨다.

일본 정부의 압력 때문에 결국 4년만에 세브란스를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서 토론토 수의대에서 교수 생활과 연구 활동을 하셨다. 은퇴 후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재입국 하며 "죽으면 이 땅에서 묻히리라!"고 주위에 알리셨다.

묘비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내가 세브란스를 졸업한지 한 달만에 돌아가셨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가슴이 먹먹했다. 할아버지를 만난 후부터 동대문 고서적 시장을 뒤져가며 샤갈의 그림을 찾아보았던 기억이 났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소와 연인들, 푸른 하늘 너머로 보이던 지붕들…. 그 너머 어디선가 짖궂은 미소를 지으지고 계실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외쳐보았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저랑, 저의 부모님께 살아갈 힘을 주시고, 길을 보여주셔서요. 원하시던 대로 이곳 한국의 땅에서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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