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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둘째'와 이별하던 날

헉, 이게 뭐야? 내 가는 길을 막아 선 웅장한 체격의 검은 물체. 새까만 벽을 만났다고 인지되는 순간 반사적으로 커브를 틀며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그 다음은 모르겠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독한 가스 냄새에 호흡이 곤란하다. 눈앞엔 흰색의 에어백이 터져 나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공기가 탁하니 문을 열자. 아니지. 저 차 운전자를 잡아야지. 도망가면 낭패다.

다행히 검은색 덩치 큰, 차 한 대가 멈춰 있음이 보인다. 운전사를 잡으려 몸을 옮기려는데 내 맘대로 안 된다. 내 차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다. 911을 돌리고 통화하는 소리다. 나이든 여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나는, 나이든 여자구나. 내 딴엔 한참 젊게 보아주려니 믿고 살았는데. 그래. 나 73세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증인을 자처하고 연락처를 준다. 경찰이 와서 리포트를 작성 후, 나는 곧 앰뷸런스로 가까운 병원에 옮겨진다. 감사하다. 여러 장의 X-레이 촬영을 마치고 잠시 후, 의사의 진단은 부러진 곳 없이 깨끗하니 퇴원하란다. 쳇. 난 기운이 쪽 빠지고 몸 가누기도 편치 않은데 얼른 나가란다. 인정머리 없는 것들.



힐허스트 길에서 북향하며 집으로 가던 길이다. 멈춰 있다가 파란불로 바뀐 후, 선셋 길 교차로를 지나 이어 접해 있는 할리우드 길 교차로까지 진입했다. 분명 빨간불로 바뀐 지 한참 된 할리우드 길 서쪽 방향에서 냅다 교차로까지 달려 나온 검은색 물건. 내 앞을 가로 막으며 지나치는 순간, 내가 그 차를 박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응급실로 실려 가며 셀폰과 운전 면허증, 보험카드, 한 장의 크레딧 카드가 전부인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손가방. 트렁크에 있는 내 핸드백 꺼내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챙긴 소지품이다. 12 년 전 당했던 사고 경험으로 보면 자칫 다 잃어버린다. 언제 어디서 누가 치웠는지 말해주는 사람 없다. 그리곤 이미 숨이 끊긴 내 차는 끌려 갈 것이다.

첫째는 5년 타고 프리웨이에서 중앙 분리대 박고, 한 바퀴 돌아 또 박고서도 나를 살려내고 죽었다. 이번 둘째는 아주 약한 사고임에도 떠났다. 역시 온전히 나를 보호해 주고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갔다. 자다가 떠나듯이 아주 조용히 내 곁을 지키지 못했다. 고마운 녀석.

5년 살고 간 첫째와 달리 12년이나 나를 기쁘게 해 주었던 둘째를, 사고 이튿날 토잉된 곳으로 찾아갔다. 금방이라도 팔짝팔짝 뛰며 오늘은 어딜 갈까요? 달려올 것 같은 모습이다. 제 몸 한편이 부서져 떨어졌어도 피 한 방울 안 흘린 깨끗한 자세로 나 괜찮아요. 안 아파요.

BMW 5시리즈. 쌍둥이 같은 두 녀석 희생으로 난, 새 삶을 산다. 앞으로 내 길을 막아 설 검은 벽 같은 존재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노기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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