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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8.15 해방 74주년의 반추

박종식 / 예비역 육군소장
박종식 / 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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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19/08/07 미주판 17면 기사입력 2019/08/06 18:58

1945년 8월15일 연합군에 의해 약탈적 제국주의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해방이 된 지 74주년이 됐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는 "현대의 역사적 위기에 처해 신의 계시를 역사상 위에서 찾아라"라고 역설한 바 있다. 여기에 부언하여 중국의 한무제 (BC140-87) 시대 남근을 떼어버리는 궁형을 받으면서도 양심과 정의에 따라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처럼 후대를 위해 올바른 사관을 가져야 한다. 이념이나 아첨으로 왜곡된 역사는 거울이 될 수 없고 미래를 창조 할 수 없을 것이다.

2차대전후 연합국은 한반도 처리를 위해 미, 영, 소, 중 수뇌들이 모여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는 40년, 1945년 3월 얄타회담에서는 20-30년, 1945년 11월 모스코바 회담에서는 5년동안 민주정치 연수를 위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판단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추해 보면 1919년 4월11일 중국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웠지만 영토도 없고 재정도 부족해 파란과 곡절만 계속되어 임시정부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감투, 이권, 정파싸움에 이념싸움까지 함으로써 우물안 개구리처럼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국제사회의 냉엄한 힘의 논리도 몰랐다.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갈라진 중국에만 의지하다가 우리도 갈라지고 이용만 당한 꼴이 되었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군무총장과 총리를 맡았던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독립운동자금 40만 루블을 횡령해서 소련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 장개석은 1942년 봄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 국무부에 타진했다. 1942년 5월1일 미국 국무부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거부했다.

당시 국무부 장관인 코델 헐의 승인거부 이유는 첫째 한국 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는 단체들이 통일돼 있지 못하고, 둘째 해외 독립단체들이 한국 내 주민들과 연관돼 있지 못하고, 셋째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버마, 인도 등과 한국을 묶어서 판단하자는 것이고, 넷째 시베리아 지역에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소련군 2개사단이 남하해 한반도를 적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내밀은 중국이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획득해서 속국화하려는 엉큼한 저의를 미국이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8.15해방이 되었어도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장 하지 중장이 한국관할 총사령관이 되고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이 되어 잠정적으로 통치했다.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거부함으로써 임정요인과 광복군(독립군과 통합)은 개인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

비록 우리가 멸시와 박해를 당했지만 우리에겐 중국인도 연합군도 하지 못한 용감무쌍한 투사의 선조들이 있었음을 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무서운 민족임을 자부한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권총으로 일본 추밀원 원장을 사살했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8일 동경에서 일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했지만 명중되지 않았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29일 상해 전승축하식에 폭탄을 투척해 최고사령관 등 국고위 간부들을 즉사시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뿐만 아니라 1920년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에게 치명타를 가한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최진동, 지청천 장군 등이 혁혁한 무공을 세운바 있다.

8.15해방 74주년을 맞이하면서 고난의 역사를 통해 "거미줄도 결합하면 사자를 묶을 수 있다"라는 격언과 "합동하면 살고 분리하면 죽는다"라는 안창호 독립투사의 외침을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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