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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가장' 이라는 무게

[LA중앙일보] 발행 2008/12/11 미주판 18면 기사입력 2008/12/10 19:37

수잔정/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살다 보면 어떤 경험은 꼭 피하고 지나치고 싶다. 소아 정신과 의사인 나는 슬픈 일을 많이 본다. 세살짜리 어린이에게 자폐증 진단을 내린다거나 축복 속에 탄생한 아기가 심한 선천성 질환을 타고 나오는 등등.

부모님들에게는 큰 상실이다. 나중에는 극복하겠지만 우선은 희망의 상실이고 자신감의 상실이다. 이런 위기를 딛고 일어서면서 어떤 분들은 나를 감동시킨다. 나도 상실을 경험한 적이 있다. 죽음보다도 아픈 고통이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 사랑하는 세 아이들의 아버지를 심장마비로 잃은 후 나는 14년간 걸음마를 새로 배웠다. 그리고 열정이 많은 현재의 남편과 재혼한 지 꼭 15개월이 된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암으로 고통받는 아내를 보살피다가 어쩔 수 없이 저 세상에 보낸 상실을 그도 경험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 한가지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다른 분들을 위해서 느낀 점을 써보지!" 라는 남편의 권유에 펜을 들었다.

혼자가 된 후에 내가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은 가장이 되었다는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행여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집에 누전이 되거나 지붕이 새지는 않을까? 행여나 세금을 안냈거나 빠뜨린 고지서는 없는지. 그래서 세금을 두번 냈거나 아예 잊어버린 적도 있었다.

과거와 똑같은 직장에서 의사일을 하며 고인이 된 남편이 재정 보장을 충분히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돈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연히 어깨가 무거워서 신문만 펴들고 앉아 있었다. 바로 가장이라는 책임감의 무게였다.

결혼생활 24년간 나는 전혀 몰랐었던 그리고 한 번도 불평을 들어본 적도 없는 크나큰 압박감이었다. 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무도 꼬집어서 말하지 않는 그러나 대부분의 남편들이(부인들이 맡는 가정도 있지만) 어깨에 메고 다니는 '가장'이라는 십자가! 아무 준비도 없이 예행 연습의 기회는 물론 지나쳐버린 후에야 나는 가장의 짐을 지게 되었었다.

발버둥을 치고 도망을 가도 결국은 내 어깨에서 벗어나지 않는 무거움! 나는 비로소 과거에 경제 문제나 육아방식 때문에 부부 싸움을 했던 것을 새로이 짚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 '아내'로서의 나와 '가장'이 된 후의 나의 심정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늘 수표의 잔고를 메꿔나가느라 애쓰던 '가장'의 마음을.

남녀 평등한 미국 사회에서 똑같은 전문인 활동을 하면서 나는 '부부 연대'의 책임이 반반이라고만 믿었다. 그런데 그 반을 뛰어 넘어 실로 측정이 불가능한 '가장'의 짐에 억눌려 있었음을 그 빈자리에서 본 것이다.

'가장'이 된 후에 나의 가치관은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다. 온 세상에 부러움 없이 활개치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 불평없이 옆에서 짐을 진 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그래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일러주곤 한다. 아무리 마음에 안드는 남편이라도 죽은 남편보다는 낫다고.

재혼을 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즐겁다. 가장의 무게로 부터 해방되었으니 적어도 나는 이제부터 가장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철든 아내가 되리라.

성숙한 두번째의 성인기를 마음 놓고 누리도록 기회를 준 나의 로맨스 그레이 남편에게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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