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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사소하고 시시한 행복

한가한 주말 오후, 참외 한 개와 책 한 권을 탁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참외를 깎아먹으며 책을 읽어볼 참입니다.

참외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마켓에서 파는 물건과 달리 겉이 까슬까슬하고 때깔도 곱지 않는 못생긴 참외입니다. 꽃이 필 때부터 익을 때까지 녀석의 평생(?)을 내가 지켜보았습니다. 알맞게 익어 단내를 풍기는 모양이 제법 먹음직스럽습니다.

몇 주 전 어느 아침, 집 뒤뜰 공터에 참외 넝쿨이 뻗어가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잔디 깎을 때 나오는 풀과 쓰레기를 모아 퇴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 거름 속에 섞여있던 씨앗이 어느 틈에 싹을 틔운 모양입니다. 맨땅에 조금씩 줄기를 키워가는 모습,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둥글둥글 몸집을 불려가는 풍경을 매일 아침 지켜보았습니다. 비료는커녕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녀석이 밭에 심어놓은 작물처럼 씩씩하게 자라는 게 놀라웠습니다.

어느 날, 잎이 노랗게 변색하고 열매가 더디게 자라는 힘든 모습이 보였습니다. 녀석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물을 뿌려주고 퇴비를 주고, 열매 밑에 또아리를 받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렇게 먹음직한 열매를 따게 된 것입니다.



참외를 깎아 한 입 베어 뭅니다. 단내가 온 방에 그득합니다. 마켓 물건과는 사뭇 맛이 다릅니다. 버려진 씨앗이었던 참외 하나가 가르침을 줍니다. 어떤 존재로부터도 우리는 배웁니다. 역경이야말로 빛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혹독한 겨울은 봄을 여물게 합니다. 남가주의 겨울이 따뜻하기 때문에 봄꽃 향기가 서울에 비해 덜한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책을 손에 듭니다. 며칠 전 어떤 이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책장을 넘기며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단내 물씬 풍기는 참외 한 조각을 씹으며, 책을 읽어가는 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이 저를 이토록 행복하게 합니다.

사실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작고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가만가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세상을 바꾸어나갑니다.

여인들은 찻잔을 내려놓은 '딸그락' 소리의 크기로 기분을 전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 옷깃의 솔밥을 말없이 뜯어줄 뿐입니다. 작은 몸짓으로 마음을 전합니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과 예기치 않는 즐거움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의 슬픔이 그것들로 인해 회복됩니다. 고 신영복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토록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러울 게 없는, 주말 오후입니다.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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