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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는 모니터ㆍ볼펜은 자판기로 '세상 급변'

아날로그 기자의 '디지털 분투기'
전화선 이용해 '하세월' 기사 전송
지금은 무선으로 검색·송고 '척척'

중앙일보에서 30년 이상 몸 담으며 가파른 미디어업계 변화와 디지털 혁신을 경험한 봉화식 부장(전략-디지털팀)이 '미디어의 생존은 디지털 혁신에' 플래카드 아래서 인터넷으로 기사 자료를 검색하고 있다. 사진 김준우 기자

중앙일보에서 30년 이상 몸 담으며 가파른 미디어업계 변화와 디지털 혁신을 경험한 봉화식 부장(전략-디지털팀)이 '미디어의 생존은 디지털 혁신에' 플래카드 아래서 인터넷으로 기사 자료를 검색하고 있다. 사진 김준우 기자

미국은 한국보다 더 뒤처졌다. 전화기도 폴더형이 오래 존속했다. 인터넷과 통신은 말할 것 없이 더욱 느려 터졌다. 50대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영어와 한글 자판을 두드리고 30여년 어린 후배들과 취재 경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한국에서라면 나이 때문에 무조건(?) 퇴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취재수첩을 들고 다니며 종이에 적는 습관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하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다. 평생 '붓쟁이'가 태평양을 건너와 사진ㆍ영상 제작도 맡으며 1인 다역(팔방미인은 좋은 뜻이므로 이 자리에서는 생략)을 담당하고 있다.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생존 차원의 멀티 플레이다. 앞으로 나이를 더 먹으면 또 어떤 물결이 신문사를 덮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일어났던 제일 큰 변화 가운데 한가지만 꼽으라면 단연 '인터넷 탄생'을 들고 싶다.

아날로그 세대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자의 '분투기'를 소개한다.



▶'신문사 언어'부터 습득한 신인 시절

야마(주제)ㆍ요코(가로)ㆍ다테(세로)ㆍ다치기리(사이드톱)ㆍ미다시(제목)ㆍ와리스케(레이아웃)ㆍ하리코미(잠복 근무)ㆍ도쿠다네(특종)ㆍ도쿠오치(낙종)ㆍ도쿠누키(기자실 왕따)ㆍ기리카에(바꿔치기)ㆍ독코타이(특공대)….

한일관계가 역대급 최악인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입사 당시에는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일본식 용어를 자주 구사하는 사람이 진정한 글쟁이(?) 취급을 받았다. 이른바 '신문용어'로 불렸다. 사쓰마와리(경찰서 출입 사건기자)를 '가슴앓이'로 잘못 알아들은 경우도 있었다.

▶먼지는 사라졌지만 몸으로 때우기

입사 한달전에 88서울올림픽이 역대 최고의 대회로 성료됐지만 신문사 업무 발전하고는 별 상관이 없었다.

편집부에서 공해가 가득한 현장에서 숨쉬며 판을 짰다. 식자 전문가가 납활자를 하나 하나 손으로 뽑아 쇠판에 집어넣고 잉크로 문지른 종이 대장을 연필로 교정봤다. 이후 사진을 뜬뒤 윤전기에 필름을 걸어 인쇄했다.

맨손으로 납을 매일 만지면 암 발생률이 높다며 노동자들에게 해독제(돼지고기)를 자주 먹게 했다. 취재 현장에서 스마트폰은 커녕 핸드폰도 없었다. 데스크로부터 '삐삐'(비퍼) 진동기로 걸려온 번호를 확인한뒤 전화를 걸어야 했다.

편집국 사무실에서는 하루종일 구식 전화기를 귀에 대고 기사를 부르는 선배들의 고함을 받아적느라고 팔이 아프고 귀가 멍할 지경이었다. 원고지에 볼펜ㆍ싸인펜으로 기사를 적어나가며 수많은 파지가 발생했다.

기본적으로 서울시내 구청과 동 이름은 모조리 한자로 외워야 했다. 이 모든 일은 CTS 전산화 제작이 자리잡은 이후 급속히 사라졌다.

▶종이 대신 컴퓨터로 신문 만들어

이후 종이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이 옮겨갔다. 확 달라진 환경에 고군분투 했다. 한국에서는 상당 기간동안 꼬마 원고지와 볼펜ㆍ싸인펜을 쥐고 세로쓰기에 한문을 섞어 기사를 썼다. 식자공이 실수로 잘못 뽑은 이승만 犬統領(견통령)ㆍ이순자 여시(여우) 활자를 교열부에서 놓치며 인쇄되는 바람에 직원들이 기관원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1997년 본격적으로 보급된 인터넷이란 괴물은 초창기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기자도 마찬가지지만 고참 선배들은 이같은 변화에 상당히 둔감했다. 컴퓨터 제작 전환기 초반에 가로쓰기가 어색하다며 투덜대고 한자가 없어지니 '한겨레 신문' 같다고 불평했다.

조간전환때는 세로에서 갑자기 가로짜기로 전환 편집이 영 어색했다.

▶현장 전화선 찾다가 스마트폰으로

사회부 초창기에는 밤샘 근무후 기자실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관내 병원 영안실과 대학교 행정실ㆍ구청 민원실도 밥 먹듯 왕래했다.

기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구경도 못해볼 장소를 골라다녔고 검찰ㆍ법원ㆍ동사무소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무술경관과 조직폭력배ㆍ깡패 비슷한 취재원들에게 멱살도 여러번 잡혔다.

랩톱 역시 90년대까지는 무선 전파로 보내는 대신 벽에 꽂아야 하는 전화기 와이어 라인을 통해 전송했다. 이 때문에 로밍 서비스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이탈리아.영국의 시골에서 무작정 가정집에 들어가 사정사정 해서 전화선을 빌렸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홍콩 출장때는 옆에서 자기 기사를 읽던 중학생 유승민이 나를 '기자 선생님'으로 불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탁구 단식 금메달에 이어 지금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겸 대한탁구협회 회장이 됐으니 세월이 참 빠르긴 하다.

캘리포니아에서 '왕고참'으로 변신한 현재는 어떤가. 그럭저럭 한사람 몫을 하며 첨단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고 있는지 두렵다. 다만 미국땅에서도 발로 뛰는 기본은 수십년째 그대로라고 생각한다.

영어로 취재하는 경우가 많아 후배들과의 경쟁력이 유지되는 것 같다. 정보 취합도 종이신문은 물론 전산망과 스마트폰을 통해 효율적으로 찾는 습관이 몸에 배어들었다. 검색과 자료는 인터넷 망에 다 들어가 있으니 잘 찾아서 정리하면 된다.

컴퓨터 조판 역시 서울에서부터 경험해서 그다지 낯설지 않다. 카멜레온처럼 변화에 적응한 자신을 바라보며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의 처절한 생존 능력을 느낀다. 무거운 랩톱 대신 자그마한 갤럭시폰 하나로 사진 무선전송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작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과연 후배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취재가 편리해졌다고 할까 여전히 무섭다고나 할까 아직도 뭐가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봉화식 기자 bong.hwashi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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