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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의 비명···"고집스레 한국서 버틴 친구 다 망했다"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0/15 13:02

"한국서 버틴 친구들 거의 망해"
중소기업 해외투자 작년 12조원
반기업 정서 겹쳐 매년 최고치 경신



베트남 옌퐁(Yen Phong) 공단 전경.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 다수가 입주해 있다. [사진 코트라]





42인치 텔레비전 화면 안에선 원단을 박음질하는 봉제 기계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형광등을 환하게 밝힌 공장엔 100명이 넘는 직원이 기계 앞에서 작업에 열중했다.

지난 4일 독산역 인근 사무실에서 만난 의류기업 김대희(58·가명) 대표는 “베트남 호찌민 공장 실시간 영상”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김 대표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가명 처리했다.)

김 대표가 베트남 공장 문을 연 건 2016년 하반기 무렵이다. 최저임금이 오르기 시작한 2017년부터 전북에 있던 국내 공장 규모를 줄이기 시작해 지난달 아예 문을 닫았다. 지난해 초엔 직원 감원을 본격화했다. 10년 넘게 함께 일한 직원을 내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대표는 “최저임금을 올려도 너무 올렸다. 누군들 해외에서 기업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나”라며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다 등 떠밀려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공장 규모를 점차 줄이면서 본사 인력 40여 명을 남기고 200명 정도를 내보냈다. 대신 베트남 공장에서 430여 명을 채용했다.

기업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의 '탈한국'은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해 중소기업 해외 직접투자는 100억1500만 달러(약 11조8700억원)로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10조원을 돌파했다.



기업 유형별 해외직접투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한국을 떠나는 중소기업이 최근 많이 늘어난 데는 지난 2년간 29.1% 급등한 최저임금 탓이 크다. 김 대표는 “베트남에서 항공편으로 상품을 들여와도 국내에서 만든 것과 비교해 마진 차이가 크지 않다”며 “직원들도 이런 어려운 사정을 다 알기에 떠나면서도 섭섭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 짠했다”고 말했다.

그는 퇴사한 직원 걱정도 쏟아냈다. 김 대표는 “(가공) 기술이 있는 직원 중엔 다른 일자리를 찾아간 분도 있지만, 기술이 없는 직원 중에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분도 있다”고 미안해했다. 베트남 공장을 연 후 그의 삶도 변했다. 한 달에 2박3일 정도는 베트남 공장 출장이 잡혀 있다. 그는 “솔직히 외국에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며 “중국에 투자해 기계 부품 하나도 못 들고 팬티 바람에 쫓겨 나온 사장들도 주변에 많다”고 했다.



베트남 옌퐁(Yen Phong) 공단 전경.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 다수가 입주해 있다. [사진 코트라]






김 대표는 해외로 나간 이유 중 하나로 반기업 정서도 꼽았다. 그는 “기업 없으면 먹고살 수 있나요. 기업도 일자리 만드는 중요한 사회 일원인데 세금 나오는 곳으로만 보는 시선이 안타깝다”며 “흑자를 내면 정부에서 다 세금으로 가져가는데 뭐하러 열심이냐는 조롱도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주변에 60대 중소기업 대표 10명 중 5명은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회사 문을 아예 닫았다”고 전했다.


“고집스럽게 한국에서 버틴 친구들은 거의 다 망했어요.”

경북 영천에서 화학섬유 공장을 운영하다 2013년 베트남 하노이 북부 국가공업단지로 공장을 옮긴 박상욱(가명·63)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임금 압박을 견디다 못해 일찌감치 해외로 나갔다. 그가 공장 이전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역시 인건비 부담이다. 베트남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20만2000원 수준이다. 박 대표는 “베트남 현지 공장 직원 250명에게 지급하는 월급 총액 4만 달러로는 한국에선 20~30명만 고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처럼 공장을 해외로 옮기거나 현지 법인을 사들이는 기업의 해외직접투자는 지난 5년 연속 증가하며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의 해외직접투자 금액은 478억6100만 달러(56조7600억원)로 나타났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80년 이후 최고치다. 눈여겨볼 건 중소기업 해외직접투자다. 중소기업 해외직접투자 증가세는 뚜렷하다. 중소기업 해외직접투자는 4년 사이 3배 넘게 증가했다(2014년 32억6500만 달러→2018년 100억1500만 달러).



투자 유형별 해외직접투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업계는 최저임금 인상을 해외직접투자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중소기업중앙회가 30인 미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303개사를 대상으로 지난 8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최근 2년간 최저임금 인상으로 부담이 심화했다는 응답이 전체의 60.1%를 차지했다. 10곳 중 6곳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폭풍을 경험하고 있다는 얘기다.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도 ‘탈한국’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염색 관련 중소기업 대표는 “공장 부지를 알아보러 캄보디아 투자청 직원과 상담을 한 적이 있는데 하나라도 더 유치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게 읽혔다”며 “한국과 분위기가 아주 달랐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탈한국 가속화 여파의 유탄을 맞은 건 바로 국내 설비투자다. 산업은행 KDB미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중소기업 설비투자 금액은 29조원(2016년) → 21조원(2017년) → 20조원(2018년)으로 감소세다. 2017년의 경우 중소기업 설비투자가 전년 대비 8조원 가까이 줄었다. 역대 최대 최저임금 인상(1060원)이 결정된 해다. 정석완 KDB미래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올해 중소기업의 설비투자는 15조9000억원 수준에 그칠 것”이라며 “자금 조달력이 낮은 중소기업이 설비투자를 줄이면서도 해외투자를 급속도로 늘린다는 건 그만큼 떠나가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투자 환경이 나빠지면서 기업이 도피하듯 해외로 나가는 게 문제”라며 “새로운 산업에만 투자가 쏠리고 국내 (중소) 제조업 투자는 줄고 해외투자가 늘어나는 투자 양극화가 이어질 경우 국내 고용의 질과 양을 모두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93년 설립한 화장품 중소기업 A사는 올해 초 국내 대신 해외 설비 투자 증설을 결정했다. 미백 화장품으로 동남아 시장 공략에 나선 이 회사는 해외 매출 비중이 전체의 70%를 차지하지만 그동안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 화장품을 수출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화장품 수요가 늘자 5억원을 투자해 미얀마 공장 설립에 나설 계획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세안제와 바디워시 같은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해 해외로 가지고 나가면 현지 화장품 기업과 비교해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이미 최저임금이 오른 상황에서 주 52시간제까지 적용될 경우 국내 공장을 증설해선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소기업의 해외직접투자가 실제 투자로 이어지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8월 관세청에 적발된 해외부동산 편법 취득자 146명 중에는 말레이시아 현지에 설립한 위장회사 명의로 현지 부동산을 취득한 중견기업 대표도 있었다. 해외 직접투자가 재산 빼돌리기로 쓰인 것이다.

강기헌·문희철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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