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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억 기부한 91세 배우 신영균 "내 관에 성경책만 넣어달라"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1/11 07:20

91세 배우 ‘남기고 싶은 이야기’ 이번주 시작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 신영균씨
평생 술·담배·도박 멀리하고 살아
연예인 남편 결사반대했던 아내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 설득
은막서 잘 나갈 때 가족 생각뿐

전성기



신영균





“이제 내가 나이 아흔을 넘었으니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저 남은 거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내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함께 묻어 주면 됩니다.”


원로배우 신영균(91·사진)씨가 인생 말미에 띄우는 편지다. 1960~7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끈 그는 최근 중앙일보와 만나 “앞으로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아직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진 않았지만 “영화계 지원과 후배 육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연예계 최고의 자산가로 이름난 신씨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꼽힌다.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쾌척해 화제가 됐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배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60~70년대에 많게는 1년에 30편씩 영화를 찍어 가며 모아 온 재산이다.

“91년 영화 같은 삶 후회는 없다, 남은 것 다 베풀고 갈 것”




신영균씨가 지난 6일 서울 명보아트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흔하나인 신씨는 카메라 앞에선 여전한 현역 배우였다.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카리스마가 남아 있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아름다운 마무리가 ‘주고 가는 삶’이라고 보시나요.
A : “크진 않지만 내 노후생활을 위해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걸 베풀고 싶은 거죠. 자식들은 다 먹을 게 충분하고….”

신씨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술·담배는 물론 여자와 도박도 멀리해 왔다. “제가 조금 재미없게 살았죠. 그래도 원칙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구순의 신씨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산다. 오전 10시 서울 명동 호텔28 사무실에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호텔28은 영화 촬영장 분위기가 물씬한 부티크 호텔로, ‘28’은 이곳 명예회장인 신씨가 태어난 해(1928년)를 가리킨다. 그의 삶을 돌아보는 첫 인터뷰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1m72㎝에 68㎏, 회색 재킷 정장에 중절모를 쓴 신씨의 첫인상은 ‘28년생’보다 ‘28청춘’에 가까웠다.



Q : 너무 젊어 보입니다. 건강 비법이 있나요.
A : “한창 촬영할 때는 피곤하니까 초콜릿·사탕을 많이 먹었어요. 40대 중반쯤 되니 당뇨가 왔어요. 그래서 단 음식은 주의하고 하루 5000보 이상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가벼운 근육운동과 러닝머신을 해요.”


Q : 당뇨 말고는 달리 불편한 곳은 없나요.
A : “배우 시절 너무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아요. 나이 먹으니 체중이 자꾸 줄어서 68~70㎏ 왔다 갔다 하는데 한창 시절엔 85㎏까지 나갔어요.”

신씨가 2010년 사회에 내놓은 명보극장은 그의 보물 1호였다. 1977년 8월 당시 7억5000만원에 인수했던 극장의 자산가치가 40년 새 60배 넘게 뛰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신씨는 ’나중에 내 관 속에 성경책 하나만 함께 묻어달라“고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다. 김경희 기자






Q : 비싸게 받고 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A : “누가 500억원 줄 테니 팔라고 하긴 했었는데 내가 거절했죠. 지금 이렇게 좋은 일에 쓰면서 오래 보존할 수 있으니 훨씬 좋지 않나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의 길 가겠다”

신씨의 기증 재산을 토대로 2011년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했다. 재단은 건물 임대료와 기부금 등 각종 수익금으로 9년째 영화인 자녀 장학금 지급, 단편영화 제작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상인데, 이 분야의 상금(5개 부문 총 1억원)으로는 최고 액수다.



Q : 마치 자식 같은 극장을 내놓으셨는데.
A : “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죠. 하지만 이제 욕심이 없어요. 그저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거는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예요. 혜진아(딸을 보며), 이걸 나랑 같이 묻어 다오.”

신씨는 가죽이 다 해어진 성경책 한 권을 만지며 말했다. 딸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이에요.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런 말씀 때문에 오늘날 신영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허허.”


한국 영화 전성기로 꼽히는 60년대는 배우 신영균에게도 황금기를 안겼다. 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하면서 그간 연극으로 다져온 연기 실력을 단박에 인정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벼락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상록수’ ‘연산군’ ‘빨간마후라’ ‘미워도 다시 한번’ 등 19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Q : 또 기회가 온다면 맡고 싶은 역할은.
A : “글쎄요…. 머슴, 왕, 군인, 사장 뭐 안 해본 캐릭터가 거의 없어요. 주로 상남자 스타일이었죠. 심지어 예수, 석가모니도 했다니까요.”


Q : 다시 태어난다면 왕, 머슴 중 뭘 고르실까요.
A : “신영균을 선택하겠어요. 배우 하며 이런 인생, 저런 인생 다 살아봤으니까요. 허허허, 정말 후회 없이, 유감 없이 살았습니다.”

“윤정희와 마지막 영화 … 알츠하이머 안타까워”




신씨의 전성기와 함께한 영화들. 사진은 ‘연산군’. 신씨는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했다. [중앙포토]





선뜻 믿기지 않았다. 일생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말 후회가 없느냐”고 여러 번 재차 물어도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였다.


신씨는 78년 ‘화조’를 끝으로 충무로에서 은퇴했다. ‘화조’ 등 40여 편에서 그와 호흡을 맞춘 배우 윤정희(75)씨 얘기가 나오자 “참 아까운 사람이에요”라는 말부터 나왔다. 윤씨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져 안타까움을 사고 있지만 신씨는 이미 윤씨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까지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면서 행사에도 자주 왔어요. 남편 백건우 피아니스트 공연이 있으면 우리 부부를 빠뜨리지 않고 초청했었죠. 우리 집에서 종종 식사도 함께 했는데 치매라니 정말 안타깝게 됐어요.”


‘빨간마후라’ 촬영하며 생사 오가




2008년 4월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 박물관 개관 기념 핸드프린팅 행사에 영화계 선후배들이 대거 참석했다. 왼쪽부터 고 신성일, 윤정희, 신영균, 문희 배우. [중앙포토]





왕년의 두 스타는 부산국제영화제 등 각종 영화 행사에서 나란히 레드 카펫을 밟으며 돈독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신씨는 2010년 윤씨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윤정희씨는 어떤 여배우인가요?”라는 당시 취재진의 질문에 “멋진 여배우!”라고 대답했다.


“윤정희씨는 나만 보면 ‘우리 같이 영화 한번 해야지, 해야지’ 항상 그랬어요. 이창동 감독을 만나서는 우리 둘이 함께 나오는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했죠.”





신씨의 전성기와 함께한 영화들. 사진은 ‘빨간마후라’. 신씨는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했다. [중앙포토]





신씨는 60년대 엘리트 배우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대 출신의 잘나가는 치과의사에서 배우로 인생 항로를 바꿨다.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연극 무대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신발을 던져가며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년 동안 지켜본 연극판은 불안정하고 무질서했어요. 연극만으로는 생활이 안 될 거라고 보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55년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열었어요.”



Q : 치과의사로도 먹고살 만하셨나요.
A : “근근이 생활은 됐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배우 김혜자씨도 고등학생 때 환자로 온 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허장강·최무룡 등 연극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들도 자주 왔어요.”


Q : 어떻게 배우를 택하게 됐나요.
A : “어느날 조긍하 감독하고 영화평론가 허백년씨가 찾아왔어요. 치과의사를 하면서도 연기에 굶주려 국립극단에 입단해 활동하던 때였는데, 내가 ‘여인천하’에서 조광조 역을 맡아 하는 걸 보고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 역을 시키면 딱 맞겠다 생각한 모양이에요. 머슴 역이다 보니 머리를 빡빡 깎으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환자 볼 일이 좀 걱정이긴 했는데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대진 의사를 고용해 1년 정도 치과 일을 병행했는데, 저한테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이 늘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치과를 그만두게 된 거죠.”


Q : 아내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A : “아내는 ‘내가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딴따라랑 결혼한 거 아니지 않냐’면서 결사 반대를 했죠. 그 당시 배우들은 스캔들이 워낙 많다 보니 아내도 그걸 걱정한 모양이에요. 나는 ‘절대 그럴 일 없게 하겠다’ ‘평생 한 여자만 사랑하겠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고 그 약속을 지켰어요. 실은 아내도 내 연극을 보면서 ‘이 양반은 하나님이 주신 탤런트가 있으니 연기를 해야 된다’ 생각은 했다고 그래요.”




신씨의 전성기와 함께한 영화들. 사진은 미워도 다시 한번’ 포스터. 신씨는 19년간 300여 편에 출연했다. [중앙포토]





60년대 영화배우들은 사실 목숨을 걸고 일했다. 수준 높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도 스턴트맨(대역 배우)도 없던 시절이다.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신씨도 여러 번 생사를 오갔다. ‘5인의 해병’ ‘빨간마후라’ 촬영 때는 실탄이 날아들었고, ‘나그네’ 촬영 때는 물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윤정희, 나만 보면 같이 영화하자고 해”

그는 상복도 많았다. ‘연산군’(1961), ‘열녀문’(1962)으로 1, 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상록수’(1961), ‘빨간마후라’(1964)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등을 받았다. 그가 받은 각종 트로피들은 호텔28, 신영영화박물관 등 곳곳에 전시돼 있다.

신씨는 충무로의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하다. 화려한 스크린과 함께하면서도 가장의 책임, 가정의 행복을 삶의 1순위에 올려놓았다. 60년대 사생활 관리 소홀로 재산·가족 등을 잃은 많은 스타 배우들과 차별화된 지점이다. 그는 “다른 배우들보다 영화를 늦게 시작했고, 이미 아내와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Q : 60년대 주연 배우들의 수입은 어땠나요.
A : “집 한 채 가격이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인데 나 같은 경우 편당 70만원 정도는 받았던 것 같아요. 1년에 20~30편씩 ‘겹치기 출연’을 할 때도 있었으니까, 이때 차곡차곡 모아둔 돈이 나중에 사업 밑천이 됐죠.”

신씨는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60년대 초 이름난 빵집이었던 명보제과를 600만원에 인수했다. 당시 명보제과는 뉴욕제과·태극당·풍년제과 등과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인기를 끌며 25년간 성업했다.



Q : 사업마다 성공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A : “노후를 생각하고 사업을 시작한 거라 절대 무리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말들이 많지만 난 모험은 하지 않고 안전한 투자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빚을 안 지고 나름 안정되게 살 수 있었네요.”


Q : 짠돌이·구두쇠 소리도 듣지 않았나요.
A :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과 달리 혹시 제대로 베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보극장을 기부했을 때 정말 기뻤고, 가족들도 적극 지지해 줬어요. 충무로의 자취를 살릴 수 있었잖아요.”

신씨는 68년부터 한국영화배우협회장·한국영화인협회장·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무로의 권익 향상에도 앞장섰다. 15, 16대 국회의원(1996~2004년)을 지내면서 국내외 문화예술 진흥에 힘썼다.



Q :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인데.
A : “그럼요. 내 나이를 보세요. 한국영화 100년 지킴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허허. 앞으로 100년이 더 기대됩니다.”

신씨의 90년 영화 같은 인생은 앞으로 매주 두 차례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신씨는 ‘빨간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한마디로 자신의 긴 여정을 압축했다.



신영균이 걸어온 길






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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