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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금빛 큰 별 지다···'가전 LG' 키운 구자경 명예회장 별세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2/13 21:52

상남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94세 일기 아버지·아들 곁으로
전자·화학 기틀로 LG 도약 견인
‘작지만 기술이 뛰어난 나라’ 꿈꿔
“고객에게 미친 영감” 별명도

재계의 금빛 큰 별 지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구자경 LG 명예회장 [중앙포토]






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연암 구인회 창업회장의 장남으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만 25년간 LG그룹을 이끈 2대 회장이다. 고 구본무 LG그룹 3대 회장의 아버지이자 현재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구광모 회장의 할아버지이다. 1950년 LG화학의 전신인 락희화학에 입사해 20여년간 생산현장을 지켰다. 그는 락희화학·럭키금성 시절의 LG를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구 명예회장 재임 시절 LG의 매출은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직원은 2만명에서 10만명이 됐다. 현재 LG의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의 기틀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다. 그는 70세가 되던 1995년 장남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낙향해 자연인의 삶을 살았다.




1987년 5월 구자경 명예회장(오른쪽 두번째)이 전경련 회장단과 농촌 모내기 일손을 돕는 모습. 그는 평소 '경영인이 아니었다면 교사나 농장 주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던 소박한 인물이었다. [사진 LG]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날 “구자경 회장은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위대한 기업가였다”며 ’공장에서 직원들과 동고동락하며 대한민국의 화학산업을 일궜고 전자산업을 챙기며 기술입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논평을 냈다. 구 명예회장은 전경련의 제18대 회장(1987~1989)을 지냈다.

‘호랑이 선생님’에서 ‘공장 지킴이’로
구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남 진주에서 부친 연암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와 부산사범대 부속 초등학교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며 교사로 재직했다.




진주중학교(현 진주고등학교) 시절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 LG]






LG 창업주였던 부친의 부름으로 1950년 락희화학에 입사한 후에는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름 없다”는 구인회 선대 회장의 철학에 따라 공장에서 십수년을 보냈다. 당시 가마솥에 직접 원료를 붓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포장해가며 손수 럭키크림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허름한 점퍼에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직원들과 함께 숙직하던 ‘공장 지킴이’였다.

구인회 선대 회장이 62세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하자 구자경은 장남 승계 원칙에 따라 45세에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한다.

‘가전의 LG’ 그 시작
1950~1960년대 말 LG는 부산의 부전동공장, 연지공장 등 생산시설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구 명예회장은 국내 최초 플라스틱 가공제품 생산 현장과 금성사의 첫 라디오 생산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1975년은 ‘가전의 LG’가 시작된 해다. 연산 50만대 대단위의 미국 수출용 컬러TV공장이 구미 공단에 세워진 것이다. 이듬해엔 냉장고·공조기·엘리베이터 등을 갖춘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이 건립됐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은 가전 수출강국의 길을 걷게 된다.




LG경영이념선포식에 참석한 구자경 회장과 허준구 [중앙포토]






이어 1970~1980년대엔 울산에 8개의 화학 공장과 충북 청주에 ‘럭키 치약’으로 대표되는 청주공장을 설립해 종합 화학사와 생활용품 강자로 등극했다. 이어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해 오늘날 전자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그룹의 경영혁신 전략을 발표하는 구자경 럭키금성 그룹회장 [중앙포토]






구 명예회장은 해외 진출 1세대기도 하다. 재임 기간 50여개의 해외법인을 세웠다. 특히 1982년 미국 앨라배마에 세운 컬러TV공장은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였다. 독일 지멘스와 금성통신의 합작에서 선진기술을 배웠고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칼텍스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던 많은 외국기업들이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올 정도였다.

“고객에게 미친 영감”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4세. [사진 LG]






그는 연암 구인회의 창업정신이자 럭키금성의 슬로건이었던 ‘인화단결·연구개발·개척정신’을 개척정신과 연구개발을 묶어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로, 인화단결은 ‘인간존중의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제정했다.

그는 새 이념이 액자에만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매년 4월을 ‘고객의 달’로 선포해 다양한 행사를 만들어냈고, 구 명예 회장 자신도 격식 없이 금성사 서비스센터를 찾아 방문 고객의 불편사항을 들었다. 결재 서류의 회장 결재 칸 위에 ‘고객결재’ 칸을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할 정도였다.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명과 오찬을 했고, 한 해에는 140차례나 임직원 간담회를 가져 “고객에게 미친 영감”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
구 명예회장은 생전 ‘땅은 작아도 기술만은 대국인 나라’를 꿈꿨다. 그는 ‘기술입국(技術立國·기술이 나라를 세운다)’의 일념으로 재임 동안 70여개의 전자·화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1993년 9월 구 명예회장(가운데)이 공장자동화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 LG]






구 명예회장의 연구개발(R&D) 열정은 퇴임 때까지 이어졌다. 은퇴를 석 달 앞둔 1994년 11월에는 나흘간 LG그룹 연구소 19개소를 둘러보며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 같은 R&D 전통은 아들 고(故) 구본무 회장과 손자 구광모 회장으로 이어져 서울 마곡의 ‘LG 사이언스파크’ 등으로 이어졌다.

재계 첫 무고 승계…70세 용퇴



은퇴 후 버섯 재배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구 명예회장 [사진 LG]






구 명예회장은 70세가 되던 1995년 2월 장남 구본무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용퇴해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라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분재와 난을 가꾸며 자연인의 삶을 살았다.

94년 인생 종막…아들 곁으로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고(故) 구본무 회장이 담소하는 모습 [사진 LG]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빈소 위치와 발인 날은 모두 알리지 않기로 했다. LG는 이날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고 밝혔다. 94세 일기로 한국 산업화를 이끈 구자경 명예회장은 지난해 5월 별세한 아들 구본무 회장 곁으로 14일 떠나게 됐다.

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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