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이 아침에] 윤정희와 알츠하이머

여배우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소식이다. TV 화면에서 남편 백건우씨가 말했다. 아내는 하나 뿐인 딸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자신이 배우였다는 것은 기억한다고, 여러분의 팬 레터가 많은 힘이 될 거라며 응원도 부탁했다.

그녀가 3년 전에 모 매체와 한 인터뷰를 찾아봤다. 당대 최고였던 여배우로서의 권위나 도도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화려했던 자신은 묻어둔 채 오직 예술가의 아내로 스스로 내려놓는 삶을 살았다. 오직 유명 피아니스트 아내로, 동네 아줌마로 살았다. 앞으로 어떤 배역이라도 연기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거냐? 라는 앵커의 질문에 그녀는 표정도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항상 주인공만 했기에 지금도 자존심이 제일 중요해요.” 앵커는 의외의 대답이라는 멘트로 끝을 맺었다. 나이에 굴하지 않는 당당함이 아름다웠다.

며칠 전 크루즈 여행을 가기 위해 여권을 금고에서 꺼냈다. 유효기간을 확인하고 찾기 편한 책상 서랍에 넣었다. 금고 문을 다시 닫으며 보니 매끄러운 면에 키를 꽂는 곳이 유난히 튀어 나와 있었다. 눈에 거슬려 그곳을 꾹 눌렀다. 돌아서서 생각하니 요새는 무엇이든 잘 잊어버려 항상 두는 곳에 둬야 나중에 찾기 쉽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금고를 다시 열어 여권을 넣으려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띡 소리가 나면서 전광판에 사인은 들어오는데 문이 안 열렸다. 진땀이 흐르면서 열이 훅 올라와 코끝이 뜨거워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다. 한 시간 이상을 금고와 씨름을 했다. 배터리도 바꿔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제조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눌러버린 그 곳에 키를 꽂은 다음 번호를 눌러서 열어야 된다고 한다. 키 꽂는 버튼을 눌러 버린 게 화근이었다.



십 수 년을 그렇게 지냈는데 왜 새삼 그곳을 눌렀을까? 어이가 없다. 키는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도 없다. 아마 깊숙한 곳에 잘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1년에 몇 번은 열고 닫았을 텐데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금고 문은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하고 낯설다. 갑자기 무섭고 두려워졌다.

나도 치매가 많이 진행이 되었구나. 한국 최고의 배우도, 미국의 대통령도 피하지 못했던 알츠하이머가 나한테도 왔구나. 나 혼자 병명을 정하고 진단도 내린다. 당황스럽다. 나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고 자식을 힘들게 하는 부모는 되고 싶지 않은데 내 맘대로 되는 일인가. 눈물이 핑 돌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얽히고 설켜 지나간다. 동동 거리며 살았는데. 비즈니스에 바쁜 중에도 열심히 자식을 키우려 애는 썼지만 좋은 엄마가 되는 법을 깨닫지 못해 서툴렀던 엄마가 아니었나 하는 미안함이 가슴 한편에서 쓸쓸하게 밀려온다.

김형석 교수의 ‘백세를 살아보니’ 강연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자식들 뒷바라지에서 벗어난 60세부터 75세까지였다고 했다. 나도 이제 막 황금기에 들어섰고 즐길 여유도 생겼고 준비도 됐는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전로사 / 수필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