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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어차피의 세상

힘든 일이 생길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 중에 ‘어차피’가 있습니다. 어차피 닥칠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어차피’와 ‘피하다’는 단어는 관계는 없는 말입니다만, 왠지 ‘피’가 공통되어서인지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차피’는 한자 ‘於此彼’ 입니다. ‘어차어피에(於此於彼)’의 줄임말입니다. 한자임을 먼저 밝히는 것은 한자지만 자주 사용해서 한자라는 생각마저 잊게 하는 단어 같아서입니다. 우리말 부사 중에는 그런 어휘가 많습니다. 한자로 안 써서 그렇지 알고 보면 우리는 한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萬若), 만일(萬一), 도대체(都大體), 대관절(大關節) 등 아주 많습니다. ‘어차피’의 의미는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등의 의미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의미, 피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조에는 이방원이 지었다는 하여가 속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어차피의 느낌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느낌입니다. 바꿀 수 없는 흐름이라는 말이죠. 어차피라는 말을 하는 상황을 보면 단념이나 체념의 느낌이 있어서 허무하기도 합니다. 포기하는 생각이 강하다고나 할까요?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인데 기어코 닥치고 말았다는 느낌입니다. 반면 어차피를 긍정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겨내자는 강한 의지가 보이기도 합니다. 어차피는 이렇게 두 가지 세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어휘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피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오는 일입니다. 살면서 아프지 않을 수 없고 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고통을 이기는 방법도 참 어렵습니다. 인연이 어렵고, 악연이 고통스럽습니다. 주변에 아픈 사람이 참 많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덩달아 아픕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치료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큰 병은 소리만 들어도 무섭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변에 많은지요? 무섭고 슬픕니다. 불의의 사건이나 사고도 참 많습니다. 주의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사고는 더 안타깝습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도대체 위로가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외롭고 무서워하는 나와 나누는 대화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나의 슬픔마저도 달래줍니다. 함께 아프고 위로할 수 있음에 그래도 감사합니다만, 실제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힘들더라도 어차피 맞아야 하는 일이라면 담담히 잘 지나가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 기도가 그에게 닿아서 정말로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차피’라는 단어를 보면서 몇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올 거였는데, 그리고 어차피 갈 건데 왜 안달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내게 닥치기 전까지는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이 많지만, 어차피 온 거라면 잘 지내고 보내야 하는 겁니다. 어차피 나를 지나갈 거라면, 잘 지나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차피’는 피할 수 없어서 답답함도 주지만, ‘어차피’는 피할 수 없기에 담담함도 줄 수 있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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