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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수 칼럼] 자연인

한국 TV프로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를 더러 본다. 혼란스럽고 법석대는 도시를 떠나 깊은 산골 오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홀로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그 프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자연인’이라고 부른다. 1960년대에 내가 한국에서 살 때는 못 듣던 말이다. 복잡하고 구속당하는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 파묻혀 원시인처럼 살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입산 동기별로 나누면 대충 세 부류로 볼 수 있다. 우선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로 대변되는 그룹. 무조건 산, 나무, 꽃 그리고 새, 벌레, 짐승 소리에 둘러싸인 별천지가 좋아서 입산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산과 나무의 기를 받아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세의 아귀다툼과 번거로움에 염증을 느껴 세상을 등진 호젓하고 친환경적 삶에서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10살 때까지 외진 산골에 있는 시골에서 살았다. 우리 집은 외딴집이었다. 제일 가까운 동네가 산등성이를 넘어 한참 가야 있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옛 향수가 밀려온다. 나도 이들 자연인처럼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자연의 신비 속에 젖어 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기도 한다. 그러나 내 처지에 나이도 나이려니와 미국에서 살면서 그럴 수는 없다. 물론 전연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80 고개를 넘고 나서 그런 도전을 할 만큼 용감하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원래가 말수가 적은 편인 나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법석대는 모임은 되도록 피하고 산다. 10여 년 전 은퇴한 후 애틀랜타에 정착하고는 사람 만날 일이 더더욱 드물다. 어쩌다 아는 사람 마주치면 듣는 인사가 그동안 무얼 하고 지내느냐, 건강은 어떠냐 하는 것이 보통이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요.” 내 상투적인 대답이다. 무위도식이란 아무 하는 일 없이 오직 먹고 놀기만 한다는 뜻이다. 내 대답에 대개는 호탕하게 웃는다. 내 딴엔 이 짤막한 말 한마디로 은퇴 후의 내 한가로움을 촌철살인(寸鐵殺人)하고 장황한 설명을 피하려는 속내가 있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가로운 사람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옛 선인들도 할 일 없이 무료하게 빈둥빈둥 놀고먹으며 밥이나 축내는 일과 마음 느긋하게 속도를 조절하며 사는 여유 있는 삶을 구분했다. 조선 시대 허균이 한정록에서 말한 “한가한 사람이 아니고선 한가함을 못 얻으니, 한가한 사람이란 등한한 사람이 아니다 (不是閑人 閑不得, 閑人不是 等閑人: 불시한인 한불득, 한인불시 등한인)”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한가로움의 멋과 정취는 언제 어디서나 느림과 여유를 두고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두보는 “물은 흘러도 마음은 바쁘잖고, 구름 떠가니 생각조차 더뎌지네(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 수류심불경, 운재의구지)”라고 그 여유로움을 읊었다.

산속에 은둔해 사는 자연인이라고 온종일 앉아서 먹고 자고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다. 자급자족하려면 산을 뒤져 나물이나 약초도 캐고, 텃밭도 가꾸고, 땔감도 마련하고, 거처도 손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시계를 볼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면 그만이다. 시간에 쫓기지도 그냥 시간에 흘러가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마주하고 시간을 자기에게 맞추며 사는 여유와 한가로움이 있다. 나는 이곳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도 쓰고, 한국에서 나오는 문학 계간지에 때맞춰 수필도 써서 보내고 또 그동안 산문집도 한 권 냈다. 내 요즘 생활이 한가하기는 하되 등한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가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법석대는 도시를 버리고 궁벽한 산골 오지나 외딴 섬을 찾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외진 곳에서 홀로 은둔생활을 해도 마음이 여유롭지 않으면 결코 한가롭다고 할 수 없다. “속세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을 모르겠구나, 마음이 외져야 사는 곳이 외지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心遠地自偏 : 결려재인경, 이무거마훤, 심원지자편)”라고 한 도연명의 시구는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화엄경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앞으로는 누가 나더러 어떻게 지내느냐 묻게 되면 무위도식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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