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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학동네] 그래도, 엄마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1/17 01:48

김정숙 수필가<br>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김정숙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멈출 수 없는 게 손주 사랑인가 보다. 할머니가 된다는 건 아주 먼 남의 얘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은 금세 내 앞에 그 이름표를 달아 주었다.

손주의 생일에 맞추어 딸 집에 갔다. 목을 감고 뽀뽀 세례를 하는 아이에게서 사랑이 녹아든다. 앙증맞은 손으로 나를 이끌고 자기 방으로 갔다. 비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살짝 가슴이 뛰었다. 장난감이며 동화책 등을 꺼내 내 앞에 펼쳐놓았다. 보물을 공유해도 되는 특별한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자주 봐야 정이 들 텐데,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할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많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이라도 아이와 많은 시간을 같이하고 싶었다. 맞벌이하는 딸에게 잠시나마 자유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돌보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번은 딸이 심야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아이 걱정은 말고 다녀오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아이를 재우려고 딸이 일러준 대로 해보아도 통하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아이는 우리에게 이불을 덮어씌우며 자라고 다독거리기까지 했다. 결국, 딸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재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기 전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손자가 방에 들어왔다. 우리를 따라가겠다며 아끼는 장난감을 짐 가방에 넣었다. 나는 몰래 꺼내서 침대 옆에 놓았다. 그것을 본 아이가 다시 가방 깊숙이 넣었다. “정말 우리랑 시애틀에 갈 거야? 응! 그럼 엄마한테 가도 되는지 허락받고 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미 방으로 쪼르르 다람쥐처럼 달려갔다.

혹시 잠든 사이 우리가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같이 자겠다며 제 덩치 만한 곰 인형을 안고 침대 속으로 끼어들었다. 신이 나서 종달새처럼 조잘대다 이내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의 등을 다독이다가 나도 모르게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그랬듯이 나도 자장가 장단에 맞추어 아이를 재웠다. 가슴 위에서 작은 손이 잠결에도 꼼지락거렸다.

나도 할머니를 무척 따랐다. 잠잘 때도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 젖을 만지면서 자곤 했다. 할머니는 늘 내 강아지, 내 강아지 하며 예뻐해 주셨다. 큰아들이 결혼한 지 6년 만에 안아보는 첫 손주였으니 할머니에게는 얼마나 귀했을까. 게다가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 때문에 일찍 엄마 젖을 뗀 터라, 더욱 안쓰러웠을 것이다.

할머니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긴 허전함을 할머니에게서 채우려 했던 것일까. 할머니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에는 치마폭을 잡아끌며 울고 떼를 써서 온 집안을 한바탕 시끄럽게 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셨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잃은 슬픔은 충격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성적이 너무 떨어져 상담까지 받을 정도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섬에서 할머니와 지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엄마가 섬에 다니러 오셨다.
엄마는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면 곧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엄마를 태운 작은 배가 노를 저어 여객선을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착장에는 가족을 배웅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로 모두 어리둥절한 사이 바닷물은 내 키를 넘겼다. 시퍼런 파도가 얼굴에 퍼붓는 짠물로 숨쉬기도 힘들었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점점 깊은 바다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를 놓칠 수는 없었다. 엄마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바다에서 나왔는지 기억에 없다.

할머니는 그냥 가라고 엄마에게 손짓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을 더는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나를 데리고 섬을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를 엄마보다 훨씬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사랑을 주어도 내 안에 있는 엄마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 일로 나는 오랫동안 할머니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돌아가신 후 한동안 할머니는 꿈에 자주 나타났다. 그런 날은 꼭 좋은 일이 생겼다.

공항에서까지 우리를 따라오겠다고 하던 손자도 마지막 순간에는 제 어미를 택했다. 어미와 떨어질 수 없었던 아이를 보면서 새삼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할머니가 애타게 그립다.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은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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