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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어머니가 보내준 내복

이정아 / 수필가
이정아 / 수필가 

[LA중앙일보] 발행 2020/01/24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20/01/23 18:33

한국에서 아들아이의 결혼피로연을 하기로 날짜가 잡혔다. 그 며칠 전 친정엄마가 저혈당쇼크로 쓰러지셨다고 연락이 왔다. “할머니는 참석 못하실지도 몰라” 했더니 아들은 서운해 한다.

피로연 당일,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로 동생이 부축해 엄마는 오셨다. 지팡이를 짚고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걸음을 옮기다 손자를 보더니 이름을 부르고 눈을 크게 뜨신다. 마치 용궁에서 심청이 만난 심봉사처럼. 온 가족이 둘러 서있다가 박수를 쳤다. 그런 기적같은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며칠 뒤 아들내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사차 할머니집에 들렀다. 할머니와 손자는 부둥켜안고 오랜 이별을 했다.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울고 울었다. 정말 살아생전의 마지막 만남일 수 있겠다. 바라보는 딸은 오히려 덤덤한데 평소 말수 적고 무뚝뚝한 아들아이가 많이 운다. 조손의 슬픈 이별장면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어머니의 간병을 위해 친정집에 머물렀다. 어머니를 돌보느라 애쓴 동생들과 올케들에게 잠시라도 휴식을 주고싶었다. 갑작스러운 엄마돌보미 역할이 서툴다. 그간 너무 무심했다.

기운없는 딸과 기운 더 없는 엄마가 마주 앉았다. 배터리 눈금 두 개 남은 딸과 남은 한 눈금마저도 깜빡거리는 엄마. 다 된 배터리들끼리 누가 누굴 돌보는지 모를 상황이다. 눈금 하나짜리의 수저 위에 두부를 얹으면 얌전히 받아드신다. 다음 순서는 고기 한 점. 고개 흔든다. 눈금 두 개짜리가 대신 먹는다. 몇 차례 반복하다가 상을 물린다. 새모이 만큼 드시고 설거지 하는 동안 잠이 드셨다.

명랑쾌활하던 엄마는 말 수 없는 낯선 엄마가 되었다. 엄마 옆에서 책도 읽고 반찬도 만들고 분리수거도 하며 목욕을 시켜드렸다. 일주일 한시적인 효녀노릇도 쉽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도 딸이 옆에 있어선지 내가 미국으로 돌아올 무렵엔 기운을 차리셨다.

기운차리신 후 첫마디가, 교회의 개근상을 물으신다. 이미 아파서 12월 한달을 결석하셨다니 무척 억울해하신다. 연말에 개근상으로 내복을 받으시곤 했단다. 어머니날엔 여름 속옷을 받고, 성경퀴즈에선 양말을 상품으로 받고, 야유회 땐 모자를 받으셔서 다 모아 놓으셨다. 겨울내의까지 구색맞춰 내게 주려고 했단다. 해마다 소포꾸러미에 들었던 것들에 그런 사연이 깃들인 줄 몰랐다. 어머니의 시간과 삶이 갈피갈피 들어있는 보따리였구나.

시간 속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낡고 때 묻고 시들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해도 엄마는 내 옆에 영원히 사실 것만 같은 어리석은 믿음이 있다. 새 달력을 걸며 벌써 내가 이런 나이가 되다니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미수(美壽)를 바라보는 딸을 낳은 엄마는 이제 88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요즘 LA도 부쩍 추워져서 내의가 필요하다. 향후 10년은 더, 엄마로부터 내의를 꼭 받아입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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