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내가 체험한 신앙의 모델 4

파푸아뉴기니 마께오족을 사랑한 정제순 선교사

내가 정제순선교사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4월 26일부터 1주일간 가졌던 선교부흥회에서다.
이 부흥회 강사로 정제순선교사가 김형남 박돈상 백승윤 이주희선교사들과 함께 초청되었다. 벧엘교회(담임 백신종목사)는 매년 4월을 선교의 달로 정하고 1주일 동안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선교부흥회를 갖는 전통이 있다.

정제순 선교사

정제순 선교사

이 전통은 1980년 김상복목사가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선교를 교회 목회에 최우선으로 두자는 목회목표를 세운데서 비롯했다. 정선교사는 당시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마께오족 베이퍼마을에서 성경번역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정선교사는 홍정욱사모와 함께 1989년 1월 사랑의 교회(담임 옥한흠목사)의 성경번역파송선교사로 이 지역에 도착, 언어만 있고 문자가 없는 이 종족에게 글자와 문법을 만들고 이를 기초로 신약성경을 번역, 10년 만인 1999년 6월 ‘마께오 신양성경’을 완성한 후였다.

두 딸과 아들도 정선교사 부부와 함께 베에퍼마을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지냈다. 아이들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어느새 현지인이 되어버렸다.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맨발로 정글을 다니는데 익숙해졌으며 노아기르는 돼지 닭 등 가축들과도 같이 뒹굴었다.



아이들을 도시에 위치한 국제학교에 보내는 대신 마께오족 학교에 보내 종족화 시켰다. 그러다가 2000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안식년을 받고, 풀러신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식구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상황을 정선교사는 그의 성경번역선교사역 이야기를 담은 저서 ‘로삐아를 찾아서’(2006, 조이웍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맡딸 예람이는 옮겨 다니는 선교사 일 탓에 엄청난 이동을 감수해왔고, 심지어 미국에서도 하루하루 달력을 지워가며 파푸아뉴기니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아이었다. 하여간 아이들은 어느새 파푸아뉴기니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둘째 예준이만 해도 그렇다. 풀러유학 당시 예준이는 LA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2002년 연이어 7개학교가 경쟁하는 영어, 수학, 글짓기 대회에 나가 1등을 하여 그곳 교장선생님의 주목을 받았다. 하루는 교장선생님께서 예준이한테 “너 PNG(파푸아뉴기니)가 좋으냐 USA(미국)이 좋으냐? 아빠만 보내고 너는 여기 있을래? 라고 했단다. 이때 4학년짜리 녀석 왈 “PNA가 좋다. 왜냐하면 거긴 비올 때 맨발로 학교 다니고, 나무에도 언제든지 올라가고…” (p.309)

나는 정선교사를 한동대학에서 두번째 만났다. 2005년 9월 성경번역역선교회(GBT) 선교사로 한동대 아시아언어문화연구소(LARILAC) 소장으로 부임했을 때다. 아릴락(ARILAC)은 Asia Research Institute of Language and Culture의 약자다. 아릴락은 성경번역 및 기독교 문서번역, 다중언어교육 등 언어관련 사역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한국 성경번선교회(GBT), 한동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국제언어연구소, 그리고 한국 교회가 공동으로 협력하여 시작한 전문 훈련기관이다. 현재 오정현목사가 이사장직을 맡고있다.

2006년 봄 어느날 정선교사가 매주 화요일 아침 8시에 있는 교수기도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는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성경번역선교사로 수십년 동안 선교사역을 해 오고 있지만 정작 내 가족중 한사람인 딸에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사로서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 딸은 첫 아이 예람이었다. 선교사로서 얼마나 마음 아픈 이야기인가?

당시 예람이는 한동대 1학년 학생으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듣고 있었다. 내가 예람이에게 아버지 정선교사가 교수기도회 간증시간에 말한 내용에 대해 물었다.
예람이는 이렇게 나에게 질문했다. “선교사 사역을 하면서 이리저리 맨 날이 이사 다니고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고통을 왜 선교사 자녀들이 같이 받아야 합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경영학을 전공해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되 물었다. “그렇다고 네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되지 않겠어?”
예람이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화가 나서 부모님에게 그저 반항한 것 뿐이에요” 예문이는 한동대를 졸업, 결혼도 하고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살아가고 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