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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시애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2/15 09:57

일곱 번째 이야기 - 잠시 집으로

우리가 도로를 달리다 보면 미국엔 유난히 세마이 트럭들이 많은 것 같다. 미국 트럭커의 길을 시작하니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When the Trucks Stop, America Stops”

미국 큰 땅덩어리에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려면 미국에선 트럭이 필수인 것 같다. 경제 동맥의 적혈구 같은 존재가 미국 트럭인 것 같다. 그런 트럭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려면 많은 트럭 드라이버가 필요하다. 초기 미국 트럭 드라이버들은 카우보이 모자에 긴 장화를 신고 트럭에 수많은 장식을 하며 멋지게 폼 잡고 운전을 했으며 그때는 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었다고 한다. 트럭 드라이버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나름대로 멋진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트럭커들이 많았던 시절에 대사건이 하나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 시기에 미국 트럭커의 대파업으로 배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하고 한두 달 바다에서 기다려야 했고 미국의 모든 물자수송이 멈추는 바람에 미국경제에 대혼란이 오는 시기가 있었다. 나도 그 당시 한국뉴스에서 미국 트럭커들의 파업으로 거리에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고 불을 지르고 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트럭 Union을 통제하고 많은 제재를 가하는 바람에 백인들의 직업이라는 트럭 일에 서서히 백인들은 떠나가고 이민지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특히 장거리 일을 나오면 짧게는 보름, 길게는 한 달 넘게 트럭에서 생활해야 하니 미국 젊은층들이 장거리 일을 안 하려고 해 트럭커가 부족한 상황에서 영어가 부족한 이민자로서는 몸만 건강하면 미국서 대학졸업한 직장인 만큼 돈을 벌 수 있으니 마다하고 달려드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이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금 열심히 운전을 배운다고 오너(Owner) 눈치를 보며 미국 전역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플로리다(FL)에서 하루를 기다리고 뉴욕(NY) 짐을 받아 뉴욕으로 향했다. 생애 처음 말로만 듣던 뉴욕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복잡하고 가는 곳마다 도로 통행료를 내야만 하는 것과 그곳에 한국 마트가 그리 많으리라 생각도 못했다.

뉴저지(NJ)와 뉴욕(NY)은 같은 동네 같았다. 늘 매스컴으로만 듣고 귀에 익은 뉴욕 땅을 밟은 것에 의의를 두고 또다시 우린 길을 떠난다. 오너의 배려였는지 내가 워싱턴에 산다고 뉴욕에서 워싱턴(WA)으로 대장정의 짐을 잡았다. 근 3000마일의 길을 우린 다시 시작하는 거였다. 뉴욕에서 시작하여 워싱턴이 종착역인 90번 도로를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좁은 공간에 한 달이 다 돼 가도록 함께 하니 이제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이야기하게 되었다. 당뇨 때문에 차 뒤 침대에 가 인슐린 주사를 스스로에게 투입하며 일하는 모습이 때론 측은하기도 했다. 이것이 미국이라고 했다. 몸이 아파도 일선으로 나서야 먹고 살 수 있는 나라. 병원비가 비싸 제대로 병원 한 번 가기 힘든 나라. 의료보험이 없어 몸 아프면 집안 망하기 쉬운 나라가 미국이라고 그는 말을 던진다. 힘들고 어려운 이민생활에 자기 주위에 겉은 번지르르하게 다니는 것 같아도 깊게 들여다보면 빈털터리 많다고.

하소연인지 불만인지 틈나는 대로 그는 미국생활의 고단함을 뱉어낸다. 흔들리는 차에 잠을 잘 수도 없고 너무 피곤하면 잠시 잠 들었다가도 금방 눈이 떠지는 적응되지 않은 환경에 난 내가 운전을 안 하는 시간에도 그의 옆에 앉아 처음 보는 미국 경치와 그의 흘러간 이민역사를 들으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가 말할 때마다 마음에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아직 미국을 모르는 나로서는 희망이 남아있고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 용트림하고 있기에 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시기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것으로 끝냈다. 오너는 당뇨가 있어 밤 운전을 하기 힘들어하고 오랜 시간을 운전하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밤에는 도맡아 내가 운전하고 꼬박 밤을 새운 후 아침 10시경 돼야 운전을 교대해 주었다. 해뜨기 직전이면 밤을 꼬박 새운 탓에 운전한 몸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몰려온다. 한밤에는 괜찮은데 새벽이 되면 졸음으로 엄청 힘들다. 평생 운전하면서 졸아본 게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때론 2~3마일을 어떻게 운전하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눈은 뜨고 있지만 뇌는 잠을 자고 있는 상황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난 신실한 신앙인은 아니지만 그때마다 누군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혼자 운전을 하고 오면 5~6일 정도 걸릴 거리를 팀으로 둘이서 운전하기에 3일 만에 워싱턴에 도착했다. 배달은 다음 날 아침이라 근처에 트럭을 세우고 뒤에 짐이 있어 오너는 트럭에서 자겠다고 한다. 난 집에 연락해 태우러 오라고 했다. 둘째와 집사람이 나를 태우러 왔다.

트럭에 내려 승용차로 이동하는 거리가 길어야 20m쯤 됐으리라 생각한다. 승용차 라이트를 내게 비추며 오기만을 기다리는 딸아이와 집사람에게 걸어가는 그 순간이 왜 그리도 비참한지... 한 달여 트럭에서 생활하고 꾀죄죄한 모습에 빨래감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스스로 창피하고 볼품없이 느꼈던 것 같다. 어쩜 이것도 일생에 있어 당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그랬을까? 한때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넥타이에 양복 입고 거들먹거리던 것이 성공이고 지금의 모습이 실패로 느껴져서 일까? 짧은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분명 난 자랑스럽지 않았다. 정말 값지고 보람된 일을 하고 오는 길이였는데 난 스스로 실패자로 여기며 집사람과 자식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까지도 나의 마음에 거만과 직업의 귀천의식이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집으로 와 아무 말없이 난 잠을 청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씩씩하고 용감했는데 트럭을 떠나니 연약한 볼품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더니 내가 나를 모르겠다. 이른 아침 몇 가지 마른 음식과 새 옷을 챙겨 나는 다시 길을 떠나간다. 어제의 연약함은 잊고 다시 용감하게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간다.

이렇게 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잠시 집에서 사로잡혔던 감성적 마음은 달리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우린 애리조나(AR)를 향하여 달렸다. 오리건(OR)을 거쳐 아이다호(ID)를 지나 유타(UT)에 다다르니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예전에 바다였던 유타 땅에는 진흙이 굳어져 수천년 내려오면서 신비한 모양을 만들어낸 바위와 돌들이 길옆에 널려 있었다. 이런 맛에 장거리 트럭을 하나보다 하는 기쁨에 가슴이 뿌듯했다. 조금 전까지 추웠던 날씨가 더워지기도 하고 푸른 숲이 사막으로 바뀌고 햇살이 가득했던 곳이 산모퉁이 돌아서니 소낙비로 변하기도 하는 마술 같은 미국 땅을 한 달 조금 넘게 우린 좁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며 무사히 출발점인 LA로 돌아오게 되었다. 무사히 돌아옴에 감사한 마음으로 오너에게 인사하고 다음 일정을 물어보려 찾으니 그는 보이지 않고 회사 사장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일단 일 갔다 온 임금은 어떻게 받느냐 물으니 회사 사장 왈 “남이 안 시켜주는 일 우리가 머리 올려주었더니 돈 달라고 한다”는 황당한 대답으로 몰아친다. 아니 어떻게 한 달 넘게 일을 시켜 놓고 임금을 안 준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미국 땅에서. 그런데 그것이 미국에서도 가능했다.

△필자 김종박 약력

중앙대 부속 중고 졸
육군 삼사관학교 18기
영주전문대 경찰행정 졸
동양대 사회복지과 졸
사회복지사
현) 코리아 시애틀 익스프레스 오너 및 오퍼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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