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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 최 "봉준호 통역 걱정, 무대공포증 씻어준 10초 비법"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2/18 20:49

미국 버라이어티, 10개월 여정 기고문 게재



지난달 12일 미국 비평가협회 시상식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통역사 샤론 최. [로이터=연합뉴스]





“2019년 4월, 봉준호 감독의 전화 인터뷰를 통역해달라는 e메일을 받았다. 단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느라 e메일을 뒤늦게 확인해 인터뷰는 이미 지나간 터였다. 나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프로답게 ‘향후 일정은 가능하니 연락 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왔고, 나는 가장 좋아하는 노트와 펜을 챙겨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책상 앞에 앉았다. 통역 경력이라고는 일주일에 불과한 나는 인터뷰 도중 봉 감독이 언급한 참고사항을 놓쳤고, ‘이제 다른 통역사가 화장실 걱정을 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가 18일(현지시간) 단독으로 게재한 통역사 샤론 최(최성재·27)의 기고문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그는 잘리기는커녕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부터 지난 9일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장장 10개월에 걸쳐 진행된 ‘오스카 레이스’를 완주했다. 지난해 ‘버닝’으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당시 외국어영화상) 예비 후보에 오른 이창동 감독의 통역을 맡았던 ‘초보’ 통역사였지만, 미국 뉴욕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시네필’의 자세가 어우러져 봉 감독의 가장 완벽한 ‘러닝메이트’가 된 것이다.

“봉준호의 속마음까지 통역한다”고 화제를 모으면서 국내외 언론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샤론 최는 직접 쓴 글로 지난 여정의 마침표를 찍기 원했다. 그는 “마침 남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던 터에 칸에서 이틀간 외신 인터뷰 통역 요청이 들어와서 참석했는데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는 순간을 무대에서 함께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6개월간의 기억은 새로운 도시와 마이크, 수상 소식 등이 뒤섞여있다”며 “목소리를 보호하기 위해 허니 레몬차를 달고 살았다”고 했다.

“불면증 달래기 위해 봤던 영화들 도움”



지난 8일 미국 필름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샤론 최. [AP=연합뉴스]





봉 감독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입을 떼던 그는 “존경하는 감독님의 말을 잘못 전달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항상 전투를 벌이는 기분이었다”며 “무대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치료법은 무대 뒤에서 하는 10초간 명상뿐이었고, 관객들이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고 말했다. “통역하는 동안에는 추억에 잠길 시간은 없다.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할 뿐”이라며 “각각의 기억을 재빨리 지워나가며 다음 말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봉준호 감독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그의 화법을 익힌 것도 통역에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샤론 최는 “불면증을 달래기 위해 봤던 영화들, 동서양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했던 노력들, 봉준호 감독의 유머와 표현력 등에 의존했다”고 밝혔다. 영화와 책으로 영어 실력을 갈고닦은 그는 “아직도 LA 캠퍼스에서 만난 친구가 ‘잘 지내? (What’s up)’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캐주얼한 대화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미국 NBC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출연한 봉준호 감독과 샤론 최. [사진 NBC]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한 그는 이중언어 사용자로서 고민도 털어놨다. “어릴 적 미국에서 2년간 살다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이상한 혼종(hybrid)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했다. “미국인이 되기에는 너무 한국적이고, 한국인이라기엔 너무 미국적인, 그렇다고 한국계 미국인도 아닌” 존재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단 얘기다. 그는 “통역사가 직업이었던 적은 없지만 지난 20년간 나 자신의 통역사로 살아왔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

“영화와 통역은 비슷, 시각적 언어 끌려”
그는 심리학자의 연구를 인용하며 “인간의 뇌 용량에는 제한이 있어 단일언어 사용자가 1만개의 단어를 안다면, 이중언어 사용자는 각 언어의 단어를 5000개씩밖에 알 수 없다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생 영어와 한국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에 좌절했기 때문에 시각적 언어인 영화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는” 것. 그는 “영화도 내면의 언어를 바깥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꺼내놓는다는 점에서 통역과 비슷하다”며 “하지만 원문과 최대한 가깝게 표현하는 단어를 위해 검색할 필요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연구에 따르면 통역은 뇌의 언어 영역이 아니라 사고의 유연성을 통제하는 부분을 포함한다”며 “연습을 통해 단련할 수 있는 근육”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통역사 샤론 최. [AFP=연합뉴스]




그는 “봉 감독과 함께 한 모든 여정이 특권이었다”고 고백했다. ‘코미디 듀오’인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물론 평소 존경하던 영화감독과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봉 감독의 인터뷰를 옆에서 듣는 것만으로 “카메라, 공간, 캐릭터 등 신성한 삼위일체에 관한 마스터 클래스를 수강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가장 큰 선물로는 “매일 보는 팀원 및 배우들과 맺게 된 일대일 관계”를 꼽았다. “이 사람들과 다시 일할 기회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내 이름 옆에 비아그라 말고 내 영화 뜨길”
현재 준비 중인 영화에 대한 구상도 밝혔다. 샤론 최는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인용한 마틴 스코세이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처럼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은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스카 레이스 여정 중에도 틈틈이 학업 프로젝트를 병행한 그는 “이제 노트북 앞에서 나와 영화 언어 사이에서 번역할 일만 남았다”고 밝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내 이름을 해시태그로 넣은 비아그라 광고를 발견하기도 하고, 뷰티 광고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에 내 이름 옆에 뜨는 광고는 내가 만든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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