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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가슴에 울리는 '워낭소리'

[LA중앙일보] 발행 2009/03/12 미주판 20면 기사입력 2009/03/11 20:45

안유회/문화부 데스크

'워낭소리'가 한국에 이어 한인에게도 통했다. 영화속 봉화마을 같이 누추한(?) '워낭소리'는 그 놀라운 의외성의 흥행을 LA에서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그랜 토리노'를 '미국판 워낭소리'라고 홍보할 정도로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LA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영화관람 데이트를 하고 있다.

흥행을 원하는 세상의 모든 영화는 관객을 홀리려 한다.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하고 더 빠르고 더 진한 것을 향해 돌진한다. '워낭소리'는 모든 흥행 영화들이 앞다퉈 몰려가는 방향과 딱 정반대로 갔다. 초라하고 누추하고 느려 터지고 맹물같다.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성공은 의외성의 승리다. 독립영화는 거대 자본의 손에서 영화를 풀어주려는 정신으로 출발했다. 태생적으로 흥행대작들이 외면하는 후미진 구석의 삶에 숨결을 불어넣고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독립영화가 아니라면 누가 그 심드렁한 산골 마을에 가서 다리 절고 이 빠진 팔순 부부와 200만원 받고 팔기도 어려운 마흔 먹은 소를 3년 동안이나 주연 배우로 출연시켜 카메라에 담겠는가.

출발부터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영화 그 중에서도 다큐멘터리. 얼핏 소 뒷걸음치다 흥행을 밟은 것처럼 보이는 '워낭소리'의 의외성은 다른 영화들이 놓친 시대의 흐름을 잡아냈다는 점이다. 물질적 안락함과 성공에 대한 굳은 믿음이 줄줄이 깨지는 지금 사람들은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경쟁이 성공을 가져오고 세상은 발전한다는 산업시대의 믿음은 금이 가고 있다. 따뜻할 때는 체온의 소중함을 모른다. 경제적 겨울이 닥치자 그런 관계가 그립고 소중하다.

'워낭소리'의 힘은 우리 안에서 잠들어있던 기억의 뿌리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소같이 일했던 아버지와 묵묵히 논을 갈던 소 그리고 어머니…. 조금의 상상력을 발휘해 거기에 나를 넣으면 얼마전 우리의 삶이 된다. 추위가 오자 그 시절 누추한 살림 속에서 진하게 나누었던 체온이 느껴진다. 그 체온이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도 새삼 깨닫는다.

'워낭소리'가 주인공들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고 것도 나를 대입하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다큐멘터리는 연출이 최대한 배제되지만 그렇다고 주관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의 거리와 각도 편집엔 결국 크든 작든 제작자의 시각이 배어들게 마련이다. '워낭소리'는 주인공들의 삶에 너무 밀착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 거리에서 관객들은 자신을 대입하고 기억 속의 체온을 되살린다. 톡 쏘는 탄산음료가 아닌 담담한 물맛. 그것이 '워낭소리'의 맛이다.

IMF 시대의 '쉬리'와 금융위기 시대의 '워낭소리'. 어쩌면 뒷날 두 영화는 시대의 흐름을 담은 작품으로 비교될 지도 모른다.

'쉬리'는 IMF의 시대의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에 뒤지지 않는 완성도 전세계에서 '타이태닉'을 누르고 흥행 1위에 오른 유일한 영화. 사람들은 '쉬리'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위기극복'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공유한다.

'워낭소리'는 금융위기 시대의 영화로 보인다. 이전에 없던 경제위기 앞에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워낭소리'는 단순히 흥행에 성공한 별종이 아니다. 사람들의 가슴과 가슴을 흐르는 시대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오늘 누군가에게 잠시 머리를 기대게 어깨를 내주었거나 말없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면 그게 '워낭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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