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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열쇠 없다…인생도 그렇다

고수를 찾아서 <5> 김대석 열쇠 명인

60년째 열쇠만 해온 베스트열쇠의 김대석 사장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하루 8시간 일한다. 기계를 만지느라 손가락에 끼인 까만 때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김상진 기자

60년째 열쇠만 해온 베스트열쇠의 김대석 사장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하루 8시간 일한다. 기계를 만지느라 손가락에 끼인 까만 때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김상진 기자

김대석 사장(오른쪽)과 대를 이어 열쇠장이가 된 아들 로렌스(47)씨.

김대석 사장(오른쪽)과 대를 이어 열쇠장이가 된 아들 로렌스(47)씨.

18세때부터 60년 열쇠 외길
‘중정’에 열쇠따기 교재 납품
월남전 미군부대 기술자 근무
72년 이민…‘베스트열쇠’ 운영
"맞는 열쇠 끈기있게 찾아서
고객 마음 열수 있어야 고수"


“청진기로 소리들어서는 금고 못열어. 영화에서 나오는 건 다 설정이지.”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답변은 단호했다. ‘베스트 락&세이프 서비스’ 김대석(77) 사장은 열쇠의 명인이다. 한국에서 열여덟살때 열쇠를 배워 올해로 60년째 한길만 걷고 있다. LA에서만 반세기 가까이 열쇠수리공으로 살았으니 한인사회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60년간 열쇠를 한 덕분에 인생을 무리없이 열었다고 했다. 가늠못할 세월은 그의 열쇠가게 내부 어디에나 있다. 300여개의 금고가 쌓여있고 40~50년된 열쇠, 자물쇠 부속품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저게 다 내 인생이지. 허허….”

15년전부터 가업을 잇고 있는 아들 로렌스(47)씨도 따라웃었다. 열고 닫고 고치고 깎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 한국, 열쇠를 깎다

열쇠는 자연스러운 밥벌이였다. 두살 위 형이 서울에서 열쇠공장을 했다. 장난감처럼 열쇠를 가지고 놀았고 자물쇠를 분해하면서 혼자 원리를 배웠다. 군 제대 후 을지로 5가에 열쇠가게를 열었다. 얼마안가 ‘솜씨 좋은 열쇠집’이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나라’에서 일한다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었어. 자물쇠 따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나보고 도와줄 수 있겠냐 묻더라고. 알고보니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사람이었지.”

60년대 국민들에게 ‘중정’은 잡혀갈까 무서운 곳이었지만, 그에겐 기회의 창구였다. 중정 요원들을 위해 ‘해정구(열쇠따는 도구)’를 만들어주고 실습용 자물쇠, 금고를 제작해 납품했다. 경찰학교에서도 같은 부탁을 해왔다. 이제 을지로는 좁았다.

# 다낭, 금고를 지키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8년이었다. ‘파월 기술자 모집’ 신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다낭의 미군 부대서 일할 금고기술자 1명을 뽑는다했다. 월급은 800달러였다. 원화로 24만원 정도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2만원, 연탄이 20원 하던 시절이다.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9명이 지원했는데 별 어려움 없이 뽑혔다. 면접관이 그가 납품한 교재로 ‘열쇠따기’를 가르친 경찰학교 간부였다. 스물여섯 총각이었으니 움직이기도 단촐했다.

“베트남에 가보니 미군 부대에는 기밀서류나 달러를 보관하는 금고들이 많았어. 한번은 수리했던 금고 내부에 3개 벽면이 달러로 가득한 박스들이 쌓여있더라구.”

3년만인 71년 귀국했다. 다시 을지로로 돌아와서 ‘서울 철물점’을 인수했다. 그런데 열쇠 기술자들 사이에서 미국 이민바람이 불었다. 베트남에서 본 미국의 고급 물자들이 눈에 선했다. 비자를 신청했다. 1년만에 열쇠수리공 비자를 받았다.

# 미국, 성공을 열다

72년 6월15일 팬암 항공기로 하와이를 경유해 워싱턴 DC에 내렸다. 주머니에 든 2000달러가 전재산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비자 스폰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너무 늦었네요. 이미 다른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어쩌나 싶었는데, 전화기 옆 옐로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몇군데 전화를 걸어 일자리를 찾는다 했다. ‘슈어피트 락스미스’ 회사에서 기회를 줬다. 이튿날 면접갔더니 그날부터 일하라 했다. “1년 정도 DC에 있었는데 춥고 비오고 날씨가 싫었어. 캘리포니아는 따뜻하고 돈도 더 벌 수 있다는 말에 별 고민없이 서쪽으로 대륙횡단을 했어.”

69년형 셰피 임팔라 중고차를 몰고 매일 800마일씩 운전해 꼬박 나흘만에 LA에 도착했다. 73년이었으니 한인타운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피코와 크렌쇼 부근의 모텔에 짐을 풀었다. 연고 하나 없이 무작정 왔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에겐 ‘옐로페이지’가 있었다. “락스미스 회사 몇군데 전화를 돌렸지. 그날 바로 백인여자가 사장인 ‘애로우 키 서비스’에 취직됐어.”

LA에서도 돈 벌기는 쉬웠다. 세금을 제외하고 매주 350달러씩 받았다. LA 원베드룸 월세가 100달러 하던 때다. 5년만인 78년 첫 가게를 차렸다. 올림픽과 웨스턴 부근이었다. “그때 한인 열쇠기술자는 작고한 김윤통 사장하고 나하고 두명 정도 밖에 없었어. 경쟁하기 보단 서로 도우면서 일했지.”

LA폭동 전년도인 91년 베니스와 웨스턴 인근 건물을 매입해 30년 가까이 ‘열쇠집’을 지켜왔다.

# 인생이라는 자물쇠

-열쇠란.

“자물쇠에 맞는 열쇠 짝은 하나밖에 없다. 맞지도 않는 열쇠 아무리 돌려봐야 문 안 열린다. 내 인생을 열어준 열쇠는 열쇠수리공 일이었다. 나한테 딱 맞는 일을 찾아 해야 행복하다.”

-뭐든 다 열 수 있나.

“아직도 못여는 것들 있다. 얼마전에 100년 넘은 금고를 여는데도 진땀뺐다. 90% 정도는 열 수 있다.”

-만능열쇠가 있나.

“뭐든 다 열 수 있는 열쇠는 없다. 호텔이나 아파트에서 쓰는 ‘매스터키’도 자물쇠에 맞춰서 만든 열쇠다.”

-청진기로 금고 못연다고 했다.

“가끔 할리우드 영화 제작진이 찾아와서 청진기 대고 열 수 있는 금고를 만들어달라한다. 현실에선 금고 다이얼 주변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연다. 홈이 일직선으로 맞는 ‘드릴 포인트’를 찾아야 하는데 금고마다 다 달라서 경험으로 아는 수 밖에 없다.”

-가장 열기 어려운 건.

“보석금고다. 금고 안쪽 잠금장치 뒤에 유리판이 있는데 드릴로 뚫다가 유리판이 깨지면 안전핀이 작동해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둑들이 금고 앞면이 아니라 옆면 혹은 뒷면을 용접기로 자르거나 뚫는다.”

-기억에 남는 일화는.

“혼자 사는 가족이 전화안받는다고 문 열어달라 할 때가 종종 있다. 열어주면 어김없이 안에 들어간 가족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변을 당했거나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거다. 돈 안받고 조용히 나온다. 또 경찰 의뢰도 들어온다. 다운타운 한 사무실에서 금고를 열어줬는데 마약이 가득 나왔다.”

-튼튼한 금고 추천한다면.

“바닥에 파묻는 금고(floor safe)가 가장 안전하다. 보통 도둑들이 금고를 통째로 들고가는 경우가 많다. 파묻는 금고는 주변에 콘크리트를 부어 고정시키기 때문에 파갈수도 없다. 주택·아파트 대문 자물쇠는 ‘메데코(Medeco)’가 좋다. 쇠 자체가 견고하다. 또 보통 열쇠는 높낮이만 깎는데 메데코는 비스듬하게 각도까지 넣는다. 열쇠따는 도구로는 99% 못연다.”

-고수는 어떤 사람인가.

“최고의 열쇠장이는 뭐든 열어줘야한다. 무조건 부술게 아니라 끈기있게 맞는 열쇠(해답)를 찾는 사람이다. 성실한 노력으로 고객의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문의:(323)733-7716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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