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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칼럼] 침묵, 그리고 바이러스의 두려움

[LA중앙일보] 발행 2020/02/28 미주판 23면 기사입력 2020/02/27 18:32

죽음은 인간의 껍데기를 여지없이 벗겨낸다. 어떠한 소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불가항력의 속성을 지녔다.

인생은 유한하다. 틀림없이 끝은 있다. 삶은 그 지점으로 귀결한다. 유예는 있어도 예외는 없다. 죽음은 실존을 직시하게 한다. 묵시적으로 두려움을 전한다.

그 기운을 느낄 때면 초연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끊임없이 욕망이 꿈틀대서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소유는 안위를 위함이다. 쟁취는 본능에 가깝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다. 가져야 안심한다. 쥐지 못하면 초조하다. 만족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게 유한한 것을 알면서도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이유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실체를 대면한다. 본색이 드러나니 기피하게 된다. 죽음의 관념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며 밀쳐낸다. 소유의 껍데기가 꾸며낸 허상에 도취한 탓이다.

생과 사의 간극에는 미묘한 무게가 존재한다. 던컨 맥두갤(1866-1920) 박사는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겠다며 죽음을 저울에 달았다. 임종 직전의 사람을 초정밀 저울에 올려놓았다. 세상을 떠난 직후 곧바로 무게를 쟀더니 21그램이 가벼워졌다. A4 용지 한장의 무게가 5그램이다. 질량적으로만 보면 죽음은 고작 종이 네 장의 합에 불과하다. 무겁디무거운 죽음의 의미는 어찌 보면 그리도 가볍다. 예사로운 것도 사실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보고 듣는 게 죽음이다.

요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소식은 죽음이 내포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밀려드는 두려움은 인간에게 내재한 욕망으로 파고든다. 불안이 맞물리다 보니 곳곳에서 원성이 높아진다. 원망의 신음이다. 일각에선 혐오와 차별까지 양산된다. 근거 없는 소문도 난무한다. 슬픈 인간사다. 상실에 대한 우려가 죽음의 단면만 보게 했다.

현세에서 영원한 건 없다. 어차피 죽는 건 자명하다. 그렇다고 실존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욕망에 충실해 내키는 대로 살겠다면 오산이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삶의 방종이다. 힘껏 움켜만 쥐다 죽는 것만큼 허탈한 것도 없다.

그럴수록 죽음이 갖는 역설에 집중해본다. 사람은 본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이 가장 순결한 때다.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마주한다는 건 솔직하고 고귀한 순간이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실존은 선택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단연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탄생은 신비다. 죽는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예측 불가다. 다만, 분명한 건 죽음은 본래 모습으로 회귀다. 청정했던 그 순간으로 말이다.

산다는 건 그래서 가치가 있다. 궁극으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껍데기를 떼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막바지에 이르면 모든 건 소멸하고 본연의 모습만 오롯이 남는다.

은연 중 죽음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스미는 요즘이다. 악재를 조심하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불안이 증폭되면 걷잡기 어렵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되레 침묵이 지닌 의미가 선명히 대비된다. 잠시 입을 닫고 죽음의 또 다른 면을 관조해보는 여유를 가져볼 때다. 그러면 두려움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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