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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미주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전투비행학교<6>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한인들
막대한 비행학교 운영 자금줄

한인청년들이 미군에 들어가 조종사가 되려는 목적은 독립전쟁이었다.

전쟁 중이던 1918년 미군에 자원입대한 이성창도 비행기복역병이 됐고 1919년에는 최자남과 박낙선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육군비행학교에서 함께 훈련받았다. 같은 해 펜실배니아주 에싱턴(Essington) 비행학교를 졸업한 노정민은 해군비행사가 됐다.

최자남은 1919년 7월 육군비행학교에서 보낸 편지에서 "비행자중에 부상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아니하되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에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면서 한인청년들의 지원을 권했다.

노정민은 1919년 10월 "천강지손 반도민족은 국가의 치욕을 씻고 민국의 국민 된 자격과 직책을 하려면 비행술을 연구치 아니하고는 조국을 빛내며 후일에 공중전쟁을 시험하며 세계열강과 더불어 문명을 서로 다툴 수 없다 하나이다."며 신한민보에 광고까지 냈다.



한인청년들은 민간 비행학교를 통해서도 비행을 배웠다.

노백린이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남쪽으로 약 26마일 떨어진 레드우드시티(Redwood City)에 있는 미국인 비행학교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한 1920년 2월 5일 이곳에는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오림하 등 한인청년 최소 6명이 조종사가 되기 위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오림하를 제외한 5명 전원은 청년혈성단 발기인들이다. 청년혈성단은 한인청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할 것으로 맹세하며 1919년 5월 캘리포니아에서 결성한 결사단체였다. 민간인 비행학교를 통해 조종사가 되려는 한인청년들의 가슴에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만 있던 셈이다.

노백린의 독립군 공군 양성과 이를 위한 비행학교 창설에 재미동포사회가 기다리고 있던 듯 동참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경제력이었다.

당시 재미동포사회의 경제적 핵심은 오늘날과 달리 북가주의 농업 특히 쌀농사를 통해 축적된 부였다.

캘리포니아는 19세기말까지는 쌀 생산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나 1912년부터 상업적 쌀농사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에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유럽이 폐허로 변하자 세계곡물시장의 수급이 급변하면서 쌀농사로 톡톡히 재미를 봤는데 캘리포니아 쌀농사의 메카가 바로 윌로우스를 끼고 있는 대평원이다.

구한말 미국으로 간 한국인들도 다수가 이 시기 쌀농사를 통해 부자가 됐고 이들의 경제력은 이 무렵 독립운동의 버팀목이었다. 1919년 재미동포의 독립자금 기부액 88000달러 가운데 49%에 달하는 42955달러가 캘리포니아 한인농장의 곳간에서 나왔다.

고정휴 교수(포항공대)의 논문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한국사학보 제29호)에 따르면 1919년5월~1920년12월10일 재정수입 131909달러(상하이 실버 달러) 가운데 재미동포 기부금이 45%였다.

<한우성 기고> wshan416@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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