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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생명시계는 '60초·5분'

고수를 찾아서 <15> 김경훈 LA시 소방관
20년차 한인 최고위직 캡틴
타운인근 20소방서 현장팀장
14년 전 본지 인터뷰로 주목

소방관들의 계급은 차량내 좌석으로 알 수 있다. 전천후 소방차량 ‘엔진’팀을 지휘하는 캡틴은 운전석 옆 조수석이다.

소방관들의 계급은 차량내 좌석으로 알 수 있다. 전천후 소방차량 ‘엔진’팀을 지휘하는 캡틴은 운전석 옆 조수석이다.

김영전 전 교수 2남1녀 막내
UC버클리·UCLA 의대 진학
다치기전 구하려 소방관 선택
3도 화상·골절 등 숱한 부상
한인 일가족 방화 가장 기억나
“가장 센 근육은 따뜻한 가슴”


‘소방관(Firefighter)’은 불과 싸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을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서다. 사람 모양을 닮은 불(火) 속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 불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다.

살리기 위한 싸움은 위험하다. 폭발, 붕괴, 추락, 질식이 곳곳에서 집어삼키려 든다. 구출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이 입고 짊어진 구조장비는 75파운드가 넘는다. 구조자까지 들쳐메야한다. 측량할 수 없는 생사의 무게가 초인적인 힘의 근원이다.

LA시소방국(LAFD)의 김경훈(48·영어명 해럴드) 캡틴은 지난 20년간 그 싸움터로 출동했다. 그는 ‘고수를 찾아서’ 시리즈 기획 때부터 주인공으로 점찍었다. 14년 전 기자와의 인연 때문이다. 당시 5년차 소방관이었던 그를 언론에 처음 소개했었다. 그는 당시 LA한인타운 전담지서인 29 소방서에서 근무중이었다. 명문대 출신인 그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소방관을 선택한 이력도 돋보였다.



그는 한인임을 알리려 ‘김’을 헬멧과 재킷에 썼다.

그는 한인임을 알리려 ‘김’을 헬멧과 재킷에 썼다.

<본지 2006년 4월3일자 a-5면>

LAFD는 뉴욕, 시카고와 더불어 전국 3대 소방국이다. 하루 평균 1400여 차례 응급출동하고 600명을 응급치료해 병원으로 옮긴다. 134년 역사를 가진 오래된 조직이지만 한인 소방관은 극소수다. 106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3500명 중 아시안 소방관은 5.8%에 불과하다.

소수 중 소수인 그는 14년 사이에 LAFD 내 한인 소방관중 최고위직인 캡틴이 되어 있었다. 한인타운 인근 에코파크 관할지서인 20 소방서의 ‘엔진(engine) 캡틴’이다. 엔진이란 길이가 짧은 전천후 소방차량이다. 사다리가 달린 긴 차량은 ‘트럭(truck)’이라고 부른다.

엔진 캡틴은 소방차량 운전·정비를 맡은 엔지니어, 소방관 2명과 조를 이뤄 함께 구조하고 지시하는 현장 팀장이다. 인터뷰한 날(16일)에 리틀도쿄 마리화나 농축액 제조공장에서 대형 폭발 화재가 났다. 소방관 11명이 다친 현장에서 그도 하루종일 뛰어다녔다. 불길에서 얻은 교훈을 물었다.

#명문대 출신 의사 지망생

그는 LA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캘스테이트 LA대학의 교수로 2005년 은퇴한 김영전(84)씨와 LA통합교육구(LAUSD) 소속 교사였던 재닛 김(84)씨의 2남 1녀중 막내다.

교육가 부모 아래서 모범생으로 컸다. UC버클리에서 화학과 정치학을 복수전공했다.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바람을 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은행에 취직했다가 UCLA 의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운명을 바꾼 수업은 명문대가 아니라 패서디나시티칼리지(PCC)에서다.

“뉴욕 은행에서 고연봉도 받았고 의사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항상 남을 돕는 직업을 꿈꿨어요. PCC 서머스쿨에 응급의료라이선스 수업을 듣다가 데이브 와이트(현 컬버시티 소방국장)의 강의에 빠졌죠. 의사는 다친 사람을 치료하지만 소방관은 다치기 전에 구해야 해요. 내 길이다 싶었죠.”

#메스 대신 호스

소방관이 되긴 어렵다. 특히 체력시험은 인간 한계에 가깝다. 50파운드 장비를 메고 계단,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호스를 끌고 수색하고, 150파운드 마네킹을 35피트 끌어 구조하는 등 8단계 작업을 10분20초 안에 완료해야 한다. 그는 1만8000명 지원자중 600명을 뽑는 30:1의 바늘구멍을 통과했다.

합격 후는 더 험난하다. 6개월 소방학교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수습기간 1년을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소방서로 발령을 받는다. 매일이 훈련이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 60초, 5분이다. 소방관들은 옷을 허물벗듯 소방차 문 앞에 벗어놓는다. 60초 안에 보호장구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5분 내 출동이 원칙이다. 심정지환자의 뇌손상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 4~6분이다.

2001년 그는 타운 전담지서 29 소방서로 첫 공식 발령을 받았다.

#'프로비'의 3도 화상

소방관들은 누구나 심각한 화상을 겪는다. 그에겐 아찔한 순간이 일찍 찾아왔다.

수습 소방관을 뜻하는 ‘프로비(Probie)’ 1년을 갓 넘긴 2002년 3월17일 그의 생일날이었다. 베니스 지역 아파트에 큰 불이 났다. 현장에 도착해 지붕에서 진화작업을 하다 불길이 치솟았다. 그걸 끄려고 불길 안에 들어갔다가 큰 화상을 입었다.

“당시엔 불 끄는데 치중하느라 뜨거운 줄도 몰랐는데 옆에 있던 캡틴이 날 잡아끌어 구해줬어요. 현장에서 탈출해보니 헬멧과 재킷이 다 녹을 정도의 화염이었죠. 목덜미에서 등까지 3도 중화상을 입었어요.”

후유증이 컸다. 2개월간 침대에서 엎드려서 지내야했다. 화상을 처음 경험한 소방관들에겐 정신적 충격으로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자다가도 이빨이 딱딱 부딪힐 만큼 무서웠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복귀하니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서워할 시간도 없었어요.”

그 후에도 왼쪽 아킬레스건이 찢어져 반년간 재활해야 했고 골절상도 여러차례 당해 수술도 받았다. 소방관의 훈장은 상처였다. 29소방서를 떠난 뒤 소방학교 조교, 26·57 소방서를 거쳐 2015년 캡틴으로 승진해 20 소방서에서 5년째 근무중이다.

#한인 최고위 ‘캡틴 김’

-14년 만의 인터뷰다.

“언론에 내 이름이 실린 첫 기사가 그때 중앙일보 인터뷰였다. 벌써 그렇게 됐다니 새삼스럽다. 미숙했던 5년차 소방관이 지금은 캡틴이 됐다. 정말 반갑고 다시 한인들에게 소개된다니 영광이다.”

-아직도 한글 ‘김’자가 헬멧과 재킷에 새겨져 있나.

“그걸 아직도 기억하나(웃음). 물론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매일 되새기게 해주는 글자다. 현장에서 날 만나는 이들에게 내가 한인임을 알리려고 썼다.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게 나와 내 아이, 가족의 정체성이다.”

-한인으로는 LAFD 내 최고위직이라던데.

“2015년에 승진했다. 소방관이 된 후 항상 ‘트럭 엔지니어(운전자)’를 꿈꿨는데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LAFD내 고용, 승진이 중단되면서다. 13년간 ‘파이어맨(fireman)’으로만 근무하다가 트럭 엔지니어 한 계급 위인 캡틴 시험에 합격했다. 지난해 12월 대니얼 이 소방관이 캡틴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유일한 한인 캡틴이었다.”

-체구가 작다. 승진으로 가는 사다리가 길었나.

“내 키가 5피트 8인치인데 우리 팀원 중에서 가장 작다. 후배 소방관 2명은 6피트 4인치다. 소방관들에게 체력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시안에 대한 고정관념이 소방국내에도 있다. ‘똑똑하긴 한데, 체력은 글쎄’하는 식이다. 그래서 더 강해지려 훈련하고 뛰었다. 매일 매일 그 편견을 깨고 입증해보여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근무환경이 달라졌나.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던 소방서 문이 닫혔다. 소방관들도 개인보호장비를 항상 착용해야한다. 산소호흡 마스크가 아니라 일반마스크를 쓰고 출동하는 것도 처음이다. 또 출동에서 돌아올 때마다 대원, 차량 모두 철저히 살균하고 있다.”

-신고건의 변화도 있나.

“코로나 이전 우리 소방서는 하루 평균 20여차례 출동했다. 그런데 팬데믹 초기에 911 신고가 2배 이상 폭증했었다. 거의 대부분이 본인이나 가족의 감염을 의심하는 패닉 상태의 신고였다. 교통사고는 건수는 줄었지만 심각한 사고는 여전하다. 교통량이 줄면서 과속 운전자가 많아진 탓이다. 화재는 뚝 떨어졌었는데 최근 다시 늘고 있다. 본부에서 원인을 분석중이다.”

-경제 재개가 거론되고 있다.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소방관들이 현장에 나갈 때 되새김질하는 원칙이 있다. 최선의 상황을 바라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말이다.”

-잊지못할 화재현장은.

“2006년 3월3일 새벽에 발생한 한인타운 5가와 아드모어의 콘도 화재다. 한인 부부와 아들 일가족이 불탄 시신으로 발견됐다. 숱한 현장에 출동했지만 이 화재는 두고두고 가슴 아팠다. 처음엔 사고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살해-자살 방화여서다. 생활고가 원인이었다고 들었다.”

당시 현장 취재기자로 사건을 보도했다. <본지 2006년 3월4일 a-1면> 당초 소방국은 누전에 의한 화재로 추측했다. 나흘 뒤 발표된 검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윤경원(당시 44세)씨가 중학생 아들 듀크(13)군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남편 이종관(45)씨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본인도 약을 먹고 불을 질렀다. 윤씨는 남편이 간질환으로 앓아 누운 10년간 생계를 책임졌다. 매달 2000달러가 넘는 치료비 빚도 윤씨 몫이었다.

-무엇이 가장 두렵나.

“불은 두렵지 않다. 소방관에게 불은 다스려야 할 일상이다. 가장 큰 공포는 내 팀원이나 동료가 다치는 상황이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부상은 내가 다치는 것보다 더 아프다.”

소방관의 ‘가족’ 개념은 업무 체제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상 한 소방서(station)에선 3개 조가 교대로 근무한다. 12~13명씩 편성된 한 조가 24시간씩 격일제로 6일간 일하고 3일 연속 쉰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10일을 24시간 함께 생활한다. 소방서 살림도 같이한다. 소방서에는 민간인 직원이 없다. 소방관들이 당번을 정해 요리, 청소, 빨래를 자체 해결한다. 생사의 현장부터 일상까지 공유하고 있어 동료보다는 가족에 더 가깝다.

-은퇴는 언제쯤 계획하나.

“마흔에 늦둥이 딸을 낳았다. 딸 애칭이 ‘아기 천사(little angel)’다. 딸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앞으로 15년 정도는 더 일을 해야 한다. 소방관들의 기대수명이 짧아서 몸 관리를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소방관은 일반인보다 평균 10~15년 수명이 짧다. 사고 위험뿐만 아니라 독성물질에 자주 노출돼 암발병률이 높다.)”

-꿈이 있다면.

“‘트럭’의 팀장 캡틴으로 승진을 준비중이다. 가장 큰 꿈은 부모님이 내게 해주신 것처럼 내 아이들의 성공이다. 필요한 걸 주고 가르치고 키워 성공할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다.”

-소방관의 정의는.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시민을 섬기는 공복(public servant)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했고, 그 책임을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최고의 소방관이란.

“나를 가르쳐준 소방국 멘토들의 공통점이 답이 아닐까 싶다. 소방관뿐만 아니라 어떤 직종에나 적용되는 원칙이다. 먼저 ‘이해’다. 동료를 알고 일에 능숙해야 한다. 다음은 ‘헌신’이다. 월급봉투보다 신념이 앞서야 한다. 마지막이 ‘용기’다. 태어날 때부터 강한 사람은 없다. 내 약함을 인정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자가 용감한 사람이다.”

-인생에 불이 났다. 어떻게 꺼야하나.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항상 떠올리는 10계명이 있다. 첫 번째가 ‘항상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라’ 이며 두 번째가 ‘도움을 구하는 모든 울음에 귀기울이라’는 것이다. 소방관에게 가장 중요한 근육은 따뜻한 가슴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고 주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


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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