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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LA, ‘버무려짐’의 아비투스

김형재 / 사회부 차장
김형재 / 사회부 차장 

[LA중앙일보] 발행 2020/06/18 미주판 17면 기사입력 2020/06/17 19:06

1982년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어릴 때 이 영화를 보며 신기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백인 경찰 주인공이 사는 도시인데 어느 나라인지 헷갈렸다.

5000년 단일민족 나라에서 살던 꼬마에게 ‘백인, 흑인, 라틴계, 아시안’이 섞여 지내는 도심 장면은 인상 깊었다. 피부색 다른 이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사는 모습, 말 그대로 미래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천사의 도시, LA의 어느 먼 미래라는 내용은 커서 알았다.

성인이 되고 LA에서 살고 있다. 여전히 신기한 도시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배운 LA는 그 이상이다. 여러 민족이 고유의 색깔을 유지하며 잘 ‘버무려져’ 산다.

20대 때 잠시 지냈던 시카고 인근 인구 30만 중소도시, 현지 백인과 흑인은 아시안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동년배 백인 무리는 낯선 아시안에게 “F* YOU!”라고 소리질렀다. (현지 백인 친구는 그들을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고 경멸했다) 흑인 점원은 낯선 아시안 주문을 허투루 받았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냉랭했던 그들의 눈빛에는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라는 경계와 멸시가 담긴 듯했다.

반면 LA에 살면서 피부색을 이유로 이방인이라 취급받은 적은 없다. 남가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 사람(One of Them)’이라는 편안함을 느낀다.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존중과 배려를 보일 줄 안다.

피부색 다른 이를 경계하던 중서부와 섞여 사는 것이 좋다는 서부. 시간이 지나 체득한 사실은 ‘경험’이란 소중함이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기회가 적은 동네는 그들만의 세상이 전부다. 우물 안 개구리, 한국 사회에서 백인·흑인·동남아인 등 피부색 다른 이를 낯설게 취급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인간(Human Being) 개념을 확장하자는 계몽주의 운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과 경험에 의해 생성되는 습성이나 성향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정의했다. 아비투스에 따르면 내 의지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취미도 사실은 자란 환경에 따른 무의식적인 행위다. 예를 들어 A는 와인과 클래식을 좋아하고, B는 소주와 대중음악을 선호한다고 가정할 때 각자가 선택한 취향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유한 집안의 자식인 A가 어렸을 때부터 와인과 클래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넉넉치 않은 집안에서 자란 B는 소주와 대중음악이 더 친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다.

피부색 다른 이를 대하는 개별 인간의 태도도 사실은 환경과 교육에 따른 무의식의 산물인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LA 등 캘리포니아는 여러 문화권 인종을 끌어들였다. 처음부터 서로를 이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문화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이 부대끼면서 ‘인식의 확장, 섞여 사는 것이 좋다’는 아비투스를 형성한 셈이다. 민족과 인종 측면에서 인류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실현한 곳이다. 물론 일부가 피부색을 자랑하며 돌출행동을 한다. 그때마다 다수는 ‘부끄러운 줄 알라(Shame on You)’고 말한다.

인종을 대하는 태도에서 경험만 맹신할 수도 없다. 다문화·다인종 환경에서 살아도 깨달음이 없다면 누구나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 경험을 토대로 한 인식확장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외침이 거세다. 섞여 사는 것이 좋다는 LA 모습처럼,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는 인식을 내면화하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강조한 품성과 인격을 기르면 부끄러움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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