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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자살보다 더 무서운 '절망'

안유회/문화부 데스크

6일 샌디에이고에서 60대 한인 부부가 죽었다.

최근에 투자한 사업이 잘 되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쏘고 자살했다. 경찰은 자살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경제난과 자살의 커넥션이 본격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올 초부터 차압과 실직으로 인한 자살은 경제난의 어두운 풍경화로 떠올랐다. 부부가 가게와 콘도의 렌트가 밀리자 목숨을 끊고 네일살롱 여종업원이 해고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안타까운 것은 최근의 경제난 자살에는 나이대가 따로 없다는 점이다. 30대~90대까지 거의 모든 연령층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샌디에이고의 한인부부도 마찬가지다. 예전엔 60대면 노후를 생각할 때다. 평균 수명이 늘면서 60대도 앞날을 생각해 무언가를 해야 된다.

전통적으로 왕성하게 경제 활동을 하던 40~50대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오하이오 주 애크론에서는 집이 차압당할 처지에 놓인 90세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가난은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현재의 경제난보다 더 큰 고통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캄캄한 산 속을 헤매도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이면 힘이 솟는다. 저기까지 가면 된다는 목표가 생긴다. 대신 환한 등불을 들고 서 있어도 보이는 모든 곳이 어둠이라면 절망감이 몰려든다.

들고 있는 등불도 없고 목표로 삼을 불빛도 없다면 절망은 더 크다. 60대에 다시 한 번 일어설 혈기는 예전같지 않은데 고생하던 이민 초기로 돌아가야 한다면 끔찍했을 것이다. 90세 할머니가 집을 빼앗긴다. 얼마나 막막했겠는가.

주류사회에서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도 절망 때문일 것이다. 가장이 가족을 죽이고 자살하는 것은 지금까지 아시아인의 자살 양태로 생각했다.

가족을 소유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절망감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사회가 지켜줄 것이라는 복지제도에 대한 믿음이 동반 자살을 막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최근의 경제난으로 미국에서도 이런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

절망은 혼자 있을 때 힘이 세진다. 어둠 속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다면 절망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주변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었던 90년대 말 일본에선 자살이 이어졌다. 경제난이 원인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이 시기 일본의 자살 풍조를 연구한 로렌 코울먼은 '모방 효과(Copycat Effect)'라는 책에서 다른 결론을 내렸다.

"경제적 곤란 그 자체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자살했다더라는 소문이 더 큰 이유였다."

자살의 매력은 그 단순함에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유혹은 달콤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는데 하면 결정은 더욱 쉬워진다.

그러나 자살은 항상 치명적인 의문을 남긴다. 그럼 남은 사람은?

최근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이 LA를 다녀갔다. 경제난과 자살에 대해 물었다.

"난 이렇게 물어요. '밥은 먹었습니까?' '예 먹었죠.'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 '차 타고 왔습니다.' '30년에 차 타고 다녔어요.' '아뇨.' '그런데 뭐가 어렵다고 그래요.'"

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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