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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바커의 가설과 코로나 후유증

2차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되었던 네덜란드는 1944년 겨울부터 1945년 봄까지 혹독한 기근을 겪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통해 라인강으로 진격하고자 했던 ‘마켓 가든’ 작전의 실패다.

연합군의 작전을 돕기 위해 네덜란드의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독일군은 이에 대응하여 농촌 지역인 동부에서 도시 지역인 서부로 수로를 통한 식량 이동을 금지해 버렸다. 1944년 11월 초에 식량 이동 제한은 풀렸지만, 이번에는 기록적인 한파로 물길이 꽁꽁 얼어붙어 도시 지역의 기근은 계속되었다. 결국 이듬해 5월 초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에야 식량 운송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배급량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전에 하루 배급량은 한 사람당 1800칼로리였는데 배급된 식량은 하루 400~800칼로리에 불과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참혹했던 기간을 '굶주린 겨울’이라고 부른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흐른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테사 로저봄 교수는 ‘굶주린 겨울’ 동안 암스테르담의 빌헬미나 하스타위스 병원에서 태어난 2414명을 대상으로 한 ‘네덜란드 기근 출생 코호트 연구’를 통해 논문을 발표했다. 로저봄 교수의 주된 관심사는 영양 결핍을 겪은 엄마의 배 속에 있던 아기들이 과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였다.



그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영양 부족을 겪었던 엄마의 배 속에 있었던 아기들이 수십 년이 지난 후 겪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당뇨병의 전 단계인 ‘포도당 불내성’이었다. 특히 엄마가 임신 초기에 영양 부족을 겪었다면 아이들이 성장한 후 저밀도지질 단백질 농도가 높았고 비만인 경우도 흔했는데, 이렇게 되면 심혈관 질환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그렇다면 엄마 배 속에서 겪은 ‘굶주린 겨울’이 결국 이들의 수명도 단축시켰을까? 남성인 경우는 확실치 않았지만, 여성인 경우에는 분명히 그랬다. 엄마의 배급량이 부족했던 여성들은 요행히 그렇지 않았던 여성들 보다 사망률이 두 배나 더 높았다. 우려했던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은 네 배나 되었고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은 무려 여덟 배가 많았다.

로저봄 교수의 연구 결과는 영국 사우샘프턴 대학 데이비드 바커 교수가 제시했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바커의 가설’로 불리는 이 이론의 요지는 임신한 엄마가 굶주리면 배 속의 아기들은 장차 궁핍한 환경을 겪을 것으로 짐작하여 되도록 칼로리를 소모하지 않고 지방으로 저장해두어 영양 부족 시기를 대비하는 체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아이들이 태어난 후 예상과는 달리 음식이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섭취하는 칼로리를 주체하지 못해 결국 당뇨나 심혈관계 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굶주린 겨울’을 겪은 네덜란드가 바로 그런 환경이었다.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는 코로나19 감염도 언젠가는 누그러지겠지만, 이 바이러스가 우리 사회에 남긴 생채기는 오래갈 것이다. 그러나 치료제나 백신 개발만이 학자들이 해야 할 연구의 전부는 아니다. 온라인 수업의 효과는 과연 괜찮은 건지, 운동장을 빼앗긴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되지는 않는지, 새 친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첫 학기를 마치는 신입생들의 대학 생활 적응에 문제는 없는지, 친지들과 교류하기 어려워진 어르신들에서 우울증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챙겨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참담했던 국가적 비극을 들추며 교훈을 찾았던 로저봄 교수처럼, 낯선 바이러스에 맞서 우리가 했던 일들을 꼼꼼히 분석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다음에는 좀 더 잘 싸워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임재준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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