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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묻어라, 안그러면 널 묻겠다”···미군 뒤흔든 여군 죽음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7/14 13:03

"내가 바네사다" 군 성폭력 경험자 한목소리

미국에서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도움을 얻지 못하고 끝내 주검으로 발견된 여군을 추모하는 물결이 일고 있다.

13일(현지시간) 미국 PBS 방송 등에 따르면 지난 주말 샌안토니오에서는 1300여대에 이르는 자동차가 모여들어 장관을 이뤘다.




육군인 바네사 기옌은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묵살당한 채 실종 2개월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지난 12일 미 LA에서 시위자들이 '기옌을 위한 정의'라는 구호가 새겨진 펼침막을 들고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차량을 끌고 나온 이들은 지난 4월 실종됐다가 2개월 뒤 사망한 채 발견된 군인 바네사 기옌(20)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들은 '기옌을 위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추모 집회를 가졌다.





스무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한 바네사 기옌을 추모하는 벽화가 미 곳곳에서 그려지고 있다. [트위터]





시위 참가자는 "당초 300대가 모일 계획이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1300대가 몰렸다"고 말했다. 미국 전역에는 기옌의 군복 입은 모습을 그린 벽화들이 등장했다. 벽화 앞엔 꽃·과일·음료수·인형 등 선물이 가득 놓였다. SNS에는 '내가 바네사 기옌이다'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성폭력 보고했지만...실종 두 달 만에 주검으로
텍사스 포트 후드 부대에서 근무하던 기옌은 지난 4월 22일 이후 행방불명 상태였다. 자동차 열쇠·신분증·신용카드 등 중요 소지품은 일터에 그대로 둔 채였다.

발견이 늦어지자 미 연방수사국(FBI)을 비롯, 육군 범죄수사 사령부와 경찰이 총력 수사를 벌였다. 찾는 이에게는 사례하겠다며 현상금 2만5000달러(약 3000만원)까지 걸렸다.




바네사 기옌이 근무했던 텍사스 부대 근처의 벽에 그의 초상화와 꽃이 그려졌다. [AP=연합뉴스]





수사 과정 중 수사팀은 기옌이 성추행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종 전 기옌은 어머니에게 "포트 후드 내 군인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다른 여군들도 당했다"면서 "(여군들이) 해당 인물에 대해 보고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기옌은 친구·가족·동료 군인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정식으로 고소하는 것은 주저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대에서 '찍혀' 도리어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300여명을 상대로 1만여 시간의 탐문조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부대 근처에 살던 시실리 아길라를 인터뷰하게 된다. 수사팀은 지난달 21일 아길라가 남자친구인 특수요원 애런 데이비드 로빈슨(20)과 통화를 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이 기옌에 관해 통화했다는 점이 드러나며 사건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시신 유기를 도운 시실리 아길라(왼쪽), 살해당한 바네사 기옌(가운데),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로빈슨 [트위터]





사건이 전환점을 맞은 건 지난달 30일. 부대와 25마일(40㎞) 떨어진 레온 강가에서 기옌의 시신 일부가 발견됐다. 발견이 늦어진 이유는 시신이 망치로 심하게 훼손됐기 때문이었다.

수사대가 유력 용의자로 지목한 로빈슨은 수사망이 좁혀지자 시신이 발견된 당일 밤, 소지하고 있던 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전역에서 관심이 몰리는 큰 사건이 된 만큼 체포 대신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시실리 아길라는 경찰 조사에서 기옌의 시신 처리를 도운 점을 인정했다. 아길라는 시신 유기 등의 혐의가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20년 징역형과 25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하게 된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네가 초대했잖아"...매장해버릴 거란 말까지 들어
바네사의 사연이 알려지자 군에는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이들의 증언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조지나 버틀러는 2009년~2013년 텍사스 포트후드 기지에서 복무했다. 기옌과 마찬가지로 버틀러도 동료 병사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다. 버틀러는 "나와 기옌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운 좋게 살아 있다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티파니 섬마는 이라크 주둔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인 지난 2009년 성폭행을 당했다. 이라크 참전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동료의 전화를 받고 저녁 식사에 초대한 것이 화근이었다. 섬마는 상급자에게 용기를 내 신고했지만 "이 사건을 묻어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널 묻어버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기옌의 고향인 미 휴스턴에서 지난 8일 '바네사를 위한 정의'라는 팻말을 든 시위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섬마는 그 뒤 성희롱·폭행 대응업무를 하는 민간인을 만났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했다. 섬마가 폭행 전 와인 한 잔을 마셨다고 하자 민간인 컨설턴트는 "그날 밤 아파트로 초대한 건 너 아니냐"며 "뭘 기대했나?"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2015년 동료 병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애슐리 마르티네즈는 "나도 너무 무서워서 가해자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면서 "누구라도 기옌처럼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 텍사스 오스틴에 그려진 바네사 기옌의 벽화 앞에 지난 6일 한 추모자가 꽃을 놓고 있다. [AP=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미 국방부 통계를 인용해 지난해 군인이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로 지목된 건수는 7825건이었다고 보도했다. 이는 2018년보다 3% 증가한 수치다.

마크 에스퍼 미 국방 장관은 최근 의회에서 기옌 사건과 관련, "군이 성희롱·성폭행을 예방하거나 피해자와 생존자를 돕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성폭력에는 무관용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옌 가족 측은 군인들의 성폭력을 신고할 수 있는 독립된 기관을 설립하는 법안을 촉구했다. 기옌의 언니인 마이라는 "성폭력을 당한 군인에 대해 유의미한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유진 기자·김지혜 리서처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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