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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숟가락과 젓가락 소고

작은 우주를 퍼 나른다. 자궁같이 생긴 둥우리는 작은 우주를 퍼 나르기에 마침맞다. 조그만 우주들이 몸에 들자 새롭게 열리는 또 다른 코스모스들.

병으로 시들시들하던 어린 시절, 죽을 입에 떠넣어 주던 어머니의 간절한 정성은 조그만 숟가락에 얹혀 있었다. 어찌 보면 자루로 이어진 그것은 생명을 이어주는 탯줄 같기도 했다.

숟가락을 들여다보면 거기서는 참한 안주인 소리가 난다. 우묵하게 들어갔나 하면 둥그렇고, 온순한 얼굴에 편한 자루가 달려 있어 쓰임에 따라 순종하는 종갓집 며느리 같다고나 할까. 자신을 비우고 정성을 다해 밥과 국을 나르며 식솔들의 생명줄을 잇는 것을 생각하면, 궂을 때나 좋을 때를 함께하는 조강지처 같기도 하다.

숟가락 옆에 놓인 젓가락은 어떤가. 집안의 바깥주인을 꼭 닮은 젓가락, 두 다리 같은 젓가락은 부지런히 밖의 반찬을 안으로 거둬들이며 나름대로의 살림살이를 꾸려갔다. 바깥주인의 벌이가 왕성해야 집안이 번성하는 것 아닌가. 고정된 한쪽 젓가락에 맞춰 움직이는 다른 한편의 젓가락은 식솔들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변모시켜가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에 반해 숟가락은, 밥이라는 주식을 담당해서인지 생명줄과 이어져 있었다. 예전부터 밥숟가락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목숨이 살아있음을 의미했고, 그것을 들 수 없음은 생명이 다했다는 뜻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숟가락은 사람의 머릿수로 간주되더니 밥그릇 싸움은 종종 왁자한 숟가락 싸움으로도 변했는데, 그것은 밥그릇 하나로 나눌 숟가락 수가 많아지며 생존의 다툼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과 끈끈하게 연결된 숟가락은 자본주의의 계층을 구별 짓는 ‘수저론’까지 펼쳐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숟가락의 재료에 따라 그 가치를 구분하듯, 이제 수저는 세상 사람들의 신분까지도 나누어 구별시켰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배운 젓가락질은 손가락의 근육들을 매번 쓰게 하여 손의 재주를 기능적으로 키워주었을 듯싶다. 젓가락 두 개를 유연하게 쓰려면 손목과 다섯 손가락 사이에 치밀한 연계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찰떡궁합의 일심동체인 부부로 상징되었다. 예전에는 첫돌을 맞은 아이나 망자에게 수저 한 벌을 마련해 주었는데 이것은 삶의 시작과 끝을 의미했다.

짜고 맵고 달고 신 삶의 맛을 직접 혀로 맛보게 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하늘의 비와 바람과 해가 맺은 열매들을 내게 옮겨다 주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무소유를 주장한다. 이승에서 평생 나를 먹여 살리며 생로병사를 같이 하다 끝내는 저승까지 먹여 살리려 품고 가는 수저.

이국에서 생을 영위해 가고 있지만 신토불이 한국 토종인 나는 때마다 포크와 나이프 대신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는다. 고유의 밥상에서 섬세한 수저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롭고 우아한 삶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에 틀림이 없다 싶다.


김영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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