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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론] 휴전 67주년과 정전 협정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
박종식 / 예비역 육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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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0/07/20 미주판 19면 기사입력 2020/07/18 19:51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3년 1개월의 혈전은 본의 아닌 정전협정 조인으로 1953년 7월 27일 일단 끝나게 된다.

전력의 열세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 원수의 지휘로 고대 그리스를 통일시킨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이 창안한 망치(Hammer)와 모루(Anvil)의 전술 원리를 적용해 1950년 9월 12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해 북진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정면에서 싸움을 벌이는 사이 측면과 후방을 공격해 적을 붕괴시키는 전술이다. 이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키자 당황한 소련은 유엔 대표 말리크를 시켜 정전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전쟁, 다른 한편으로는 정전 회담을 계속하게 됐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정전 예비회담에 유엔군 측 수석대표 조이 해군 중장, 호지스 소장, 크레이기 소장, 버그 해군 소장, 한국 1군단장 백선엽 소장 등 5명이 참석했다. 공산군 측 수석대표는 남일(소련군 대위 출신) 중장, 이상조 소장, 장평산 소장, 중공군 덩화이 중장, 세황 소장 등 5명이 참석했다.

그들은 회담 첫날부터 심리전으로 나왔다. 유엔 측 차량에는 백기를 달게 하고 안내 차량에는 공산군 장교들이 타고서 승리의 ‘V’자 표시를 했다. 마치 유엔군이 항복하러 가는 것처럼 해서 전 세계에 공개했다. 회담장 의자도 유엔 측 자리는 낮게 하고 공산 측 자리를 높게 만들어 내려다보이도록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10시 판문점 본회의에서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측 대표 남일 중장이 협정문에 서명하고 유엔군 사령관 크라크 대장, 김일성 주석, 중공군 펑더화이 인민지원군 사령관이 최종서명을 함으로써 일단은 정전이 됐다.

그러나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와 국민들의 북진통일, 휴전 결사반대로 정전 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북진통일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에 맞서 1953년 6월 18일 새벽2시 기습적으로 포로 17만3000명 중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석방시키자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덜레스 국무장관이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잠에서 깨우고 백악관으로 달려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은 다음 전쟁의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라고 간단명료하게 강변했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책임추궁을 하기 위해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특사로 서울에 급파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의 의지와 결단에 오히려 설득당했다.

18일간의 이승만 대통령은 면담에서 첫째 상호 안전보장 조약의 체결, 둘째 최초 2억 달러의 원조자금 제공 및 경제원조 약속, 셋째 육군 20개 사단 증강과 해공군의 승인, 넷째 한미 정부는 휴전 후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 달성, 다섯째 공동목적에 대한 한미 정상회담 개최 등을 받아냈다.

미국이 문책하러 왔다가 지원을 약속하고 간 격이 됐다. 당시 로버트슨 국무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사람(Great Man)’이라고 회고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의 사물을 환히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단호한 결단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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