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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기독교 '서(恕)'의 태도 회복해야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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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중앙일보] 발행 2020/08/11 종교 14면 기사입력 2020/08/10 17:57

UCLA 한국 기독교학 옥성득 교수 특별 기고

배려의 마음은 공감과 소통
팬데믹 시대의 윤리 '헤아림'

과유불급의 개신교 절제 필요
책임있는 공동체 모습 보여야


코로나 이후 시대는 없다. 코로나와 더불어 사는 시대가 이어질 것 같다.

이런 시대에 개신교에 필요한 윤리는 무엇일까. 바로 논어에 나오는 '서(恕)'의 태도라 본다.

논어의 본문을 보자.

자공이 공자께 "한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게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공자께서는 "서(恕)로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아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기소불욕물시어인ㆍ己所不欲勿施於人)이 평생 실천할 덕목이다. 한 글자로 줄이면 '서(恕)'가 된다.

서(恕)는 마음(心)을 같이(如) 하는 것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배려의 마음이다. 서(恕)라야 공감과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과거 개신교인들은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을 마태복음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과 비교하며 유교를 과소평가하곤 했다. 즉, 기독교는 적극적인 사랑의 종교요, 유교는 소극적인 체면의 종교라고 평하며 기독교의 우월성을 논했다. 오해이다.

두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말이다. 구약 외경인 '토빗기' 4장15절은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라고 한다.

탈무드에서 랍비 힐렐은 율법의 요지를 묻는 이방인에게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당신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율법 전체의 정신이며 다른 모든 것은 그 설명입니다. 가서 그것을 배우시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유대교 전통을 보더라도 복음서 황금률을 뒤집으면 그 뒷면에 서(恕ㆍ기소불욕 물시어인)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恕ㆍ관용ㆍ용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헤아림의 마음이요 공감하는 태도로서 예의 핵심이다. 더불어 사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윤리가 바로 예(禮ㆍmutual contractual relationships)이다. 무례하지 않음, 바로 이것이 팬데믹 시대의 윤리다.

내가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헤아려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악플ㆍ뒷담화ㆍ신상 캐기ㆍ가짜 뉴스 생산ㆍ바이러스 전파ㆍ성희롱 등)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팬데믹 시대에 착한 사람이 되는 비결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부과하려는 태도가 문제가 될 때가 많다. 내가 어떤 것을 받고 싶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나에게 복음이 좋아도,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배려의 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내 감정, 내 주장, 내 메시지를 강요하지 말자. 그런 배려의 정신이 없을 때, 기독교는 무례한 종교가 된다. 화려한 행사, 이벤트, 대형 모임이 없어도 좋다. 가만히 옆에 있어도 편한 교회, 고통을 이해해 주는 교회, 그리로 가면 아무 피해가 없으리라는 믿음을 주는 안전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게 더 중요한 시절이다.

코로나 사태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교회'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서(恕)의 교회이다. 팬데믹 시대에는 착한 일을 많이 하기보다는 나쁜 일을 적게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무엇인가를 해 주려는 자세보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를 우선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고난과 슬픔의 시대에 나의 고통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 같은 마음이 되는 것,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부단히 자신을 쳐서 절제하는 것, 그것이 서(恕)이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유위(有爲)의 종교였다.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종교가 되려면 강력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열매인 절제가 있을 때, 필요한 일만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과유불급, 지나치게 행동적이요 과시적이었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훈련을 하려면 절제해야 한다. 무위(non-doing) 속에서 기도와 성찰로 신자와 교회 됨(being)을 회복하고, 한국 사회에서 어떤 존재가 될(becoming)지를 묵상할 때이다.

지금 교회는 관성 때문에 모이기를 힘쓰려고 한다. 그 열심을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어떤 낯선 보균자가 교회에 와서 바이러스를 퍼트려 환자가 늘어나면 그를 싫어하게 되듯이, 교회에 확진자가 발생하고 그를 통해 주변에 환자가 확산하는 폐를 미친다면, 누가 교회를 책임 있는 공동체라고 하겠는가.

가주에서는 넉 달째 예배당에 가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크게 불평하는 교회는 없고 신자들도 안전을 우선 가치로 여긴다.

교회에 가야만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약 체질의 성도를 만든 것은 회개해야 한다. 초파일이나 한두 차례 절에 가도 일상에서 불자로 사는 사람이 많은 불교나, 가정교육과 가정 제사로 효와 인과 서의 가치와 정신을 유지한 유교로부터 배울 일이다.

더 이상 개신교의 작위적 예배, 말뿐인 설교, 시끄러운 찬양을 원하지 않는다. 팬데믹 시대는 무위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만나도록 할 때이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도 운행되는 우주의 신비를 깨달아 스스로 신비가 될 때이다. 무위이화(無爲而化),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으나 변화되고, 죽은 자 같으나 살았고, 무식한 자 같으나 유식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사는 신비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지는 서(恕)의 삶의 양식을 배울 때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는 들판의 꽃과 같이 자연스러운 교회, 한적한 오솔길에 놓여 있는 작은 벤치와 같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교회, 새벽녘 조용한 해변에 부는 바람같이 상쾌한 교회를 그린다.

그런 무위와 침묵 속에 안식하고 평안하되 생명을 충만케 하는 교회를 만들자.

<이 기고글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 나무'에도 함께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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