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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칼럼] 폭염… 고달픈 이민의 여정들

# 3년 남짓이었던 것 같다. 애리조나에 잠시 살았다. 처음 터를 잡은 게 이 무렵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 8월이었다. 가뜩이나 뜨거운 곳이다. 5월부터 100도를 넘긴다. 7, 8월에는 120도가 예사다. 해가 뜨면 바로 땡볕이다. 오전 7시부터 이글대고 밤 9시까지 후끈거린다. 수도를 틀어도 찬물이 없다. 늘 뜨뜻미지근하다. 그나마 건물 안은 낫다. 나가면 바로 한증막이다. 숨이 턱하고 막힌다. 주차장 차까지 1분 남짓 거리도 휘청한 경험이 몇 차례다.

# 당연히 피닉스 여름은 비수기다. 특히나 골프장은 말도 못한다. 그 날씨에 누가 치겠나. 말 그대로 개장 휴업이다. 간혹 최상급 코스가 파격가로 열린다. 10~20달러에 점심 제공 플랜이다.

한인들에게는 이때가 기회다. 삼삼오오 약속잡기 바쁘다. 심지어 하루에 두 라운드(36홀)를 도는 플레이어도 있다. "PGA 프로도 아니고, 염천에 그러다 큰 일 나려고….” 주위의 핀잔도 아랑곳없다. “우리야 뭐 아무 것도 아니지. 히스패닉 친구들은 이 날씨에 전후반 90분씩 축구도 하는데.”

# 어느 날이다. 안 좋은 뉴스가 들렸다. 그로서리 마켓에 강도가 들었다. 권총으로 위협하며 현금을 요구하다가 싸움이 생겼다. 마침 카운터를 지키던 한인 업주의 친형이 당했다. 격투 끝에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몇 건 더 있었다. 인근 리커스토어의 또다른 한인도 희생됐다. 현금을 빼앗아 달아나던 무장 강도를 맨손으로 뒤쫓다가 변을 당했다. 기억으로는 피해액이 몇 백 달러 남짓이었다.

“그냥 없는 셈 치시지. 구태여 따라가서….” 안타까운 마음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랬더니 동료 업주 한 분이 고개를 젓는다. “몰라서 하는 소리야. 거기 하루 종일 앉아 있어봐, 누가 100달러라도 가져가면 눈에 뵈는 게 없어. 앞 뒤 생각없이 쫓아가게 돼 있다니까.”

사고가 계속되자 머리를 맞댔다. (한인)상공회의소 대책회의다. ‘업소마다 투명 방탄 칸막이를 설치합시다.’ 처음에는 뜻이 모였다. 하지만 며칠 뒤 안건은 자취를 감췄다. 회원들 대부분은 영세업자다. 설치비만 몇 천 달러다. 선뜻 OK가 어려운 형편들이다. “여지껏 이렇게 살았는데 뭘 새삼스럽게.” 자조와 한탄이 흘러나왔다.

# 방탄 칸막이는 그나마 사치품이다. 그로서리 마켓, 리커, 담배가게. 한인들 매장 상당수는 에어컨 설비조차 없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고 낙후된 슬럼가에 위치했다. 아예 시스템 자체가 안된 곳이 대부분이다. 공급되는 전기 용량도 문제다. 냉장고 돌리고, 전등도 켜야한다. 에어컨까지는 버틸 수 없다는 말이다.

애리조나 한 여름을 가정용 선풍기 하나로 버텨야한다. 생각해보라. 말이 120도다. 오전이면 이미 온 몸이 흥건하다. 그래도 주 7일 쉴 수가 없다. 일요일 예배 시간 빼고는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 못한다. 그래야 집 한 칸 장만하고, 자식들 대학이라도 보낸다는 생각들이다.

# 다시 강도의 흉탄에 친형을 잃은 업주 얘기다. 사건 직후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수습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다. 가게는 다시 문을 열었다. 오전에 그런 일을 당하고도, 오후에 영업을 계속한 것이다. 그쪽 한인 사회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어찌 애리조나만의 얘기겠나. LA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가주,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애틀랜타…. 어디라도 비슷하리라. 불과 얼마 전까지, 어쩌면 지금 현재도…. 험하고, 고달픈 여정들이다. 공포와 차별, 그리고 극한을 이겨낸 인내와 헌신. 그런 것들이 우리 이민사의 실체일 것이다.


백종인 /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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