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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9월을 맞으며

“우수 어린 정원에 피어 있는 꽃에 싸늘한 비가 내린다/ 그러자 여름은 몸을 부들 떨며 말없이 자신의 임종을 맞는다// 황금빛으로 물든 나뭇잎이 펄럭펄럭 높다란 아카시아 나무로부터 추락한다/ 그리고 여름은 깜짝 놀라 힘없는 미소를 꿈이 사라지는 마당에 보낸다// 이미 그전부터 장미꽃 옆에서 다소곳이 휴식을 기다리고 있다.”(헤르만 헤세 시 ‘9월’ 중에서)

자신의 눈에 비친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시다. 자연이 그의 감각의 심상을 따라 그의 눈을 감지하고 그의 시 세계에 9월의 정취를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여름이 가고 있는 정원의 아슬한 경계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정취를 미학적 낭만으로 비춰볼 때 여기에서 계절은 분리 또는 이별이다. 우주적 질서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가 아닌 강제적으로 쫓겨 가는 결핍의 시간이다. 작가의 특정한 상황 속에서 부여되는 이 상황은 다른 이에게도 꼭 동일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이형기의 ‘낙화’ 시가 떠올랐다. 헤세의 ‘9월’과 이형기의 ‘낙화’의 공동 모티브는 떠나는 여름이다. 헤세는 ‘여름은 몸을 부들 떨며 임종을 맞는다’고 표현했고, 이형기는 ‘가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 떠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두 시인이 바라보는 여름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이형기는 이별을 세상의 순리로 받아들였고, 헤세는 꿈이 사라지는 추락 의미로 봤기 때문이다. 두 작가는 자신들의 시각적 상상에서 잉태된 것을 표현했지만, 주제 의식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삶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사람살이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바로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 같은 상황이다. 내가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즉 나로 인한 것이 아닌, 전혀 생각지 못한 엉뚱한 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이런 자연재해는 피해가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은 벼락처럼 전율시킨 한 줄의 시구에서 인생이 달라진다거나, 혹은 화살처럼 꽂히는 어느 한 영혼에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셀리 커이건이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를 밤새워 읽어도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 건지 정답을 못 찾듯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정답은 없다. 다만 이런 문제를 화두로 삼고 사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다.

여름은 이윽고 지친 눈으로 떠나고 9월이 왔다. 자연은 내년이 되면 어김없이 여름을 다시 불러 앉힌다. 그러나 인생은 돌아올 수가 없다.

아킬레우스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이 영원히 죽지 않도록 스틱스 강물에 몸을 적셔주지만(발뒤꿈치는 물이 닿지 않아 그곳에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죽는다) 우리는 그처럼 손을 써줄 신도 없고 그런 방책을 쓴다 한들 들어줄 귀도 없다. 다만 추락하는 나뭇잎처럼 ‘몸을 부들 떨며 자신의 임종을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볼 일이다.


정국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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