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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길 위에서 만난 길

산티아고 길을 생각한다. 봄기운이 뻗쳐오르던 스페인의 5월, 한 달을 꼬박 걸었다. 산티아고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이었다. 산티아고 길과 함께,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주는 감동 때문이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멕시코 만류가 흐르는 곳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80일 넘게 고기를 잡지 못한 주인공 산티아고는 포기하지 않고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 바다로 향한다.

나도 그렇게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었다. 작은 배낭 하나를 메고 산티아고 노인이 되어, 그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터벅터벅 걸어서 완주해내고 싶었다.

노인이 커다란 청새치를 낚시로 잡지만 상어들에게 빼앗기고 앙상한 가시만 뱃전에 달고 들어오듯, 나도 그 길에서 고기를 건져 올려 가시만 남은 그 무엇을 배낭에 걸고 돌아오고 싶었다.



산티아고는 500마일, 2000리 길이다. 걷기 시작하여 닷새째 되는 날, 에스텔라에 도착했다. 1090년 나바라 왕국 때 만들어진 도시다. 마을 입구에 성당이 보였다.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지붕 위에 풀이 수북하고, 벽은 낡아 군데군데 비가 흘러내린 자국이 보였다. 저 위로 얼마니 오랜 세월이 흘러갔을까.

정문 앞에 성인 석상이 양쪽에 나란히 서 있었다. 석상은 손도 코도 입도 사라지고 흐물흐물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숨이 턱 막혔다. 눈을 감은 채 서있는 석상의 모습에 울컥 울음을 삼켰다.

고통의 절정에서도 평온하게 서 있는 석상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울면서 서 있는 나에게 석상이 고요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라, 괜찮다. 나를 봐라. 손은 빈손으로, 눈은 영원을 향해, 그렇게 살아라. 네, 나는 울먹이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아스텔라의 성인 석상은 초라한 내 인생의 스승이 돼 주었다.

오래전 만들어진 풍경 사이로 누군가 걷기 시작했다. 길이 났다. 천 년의 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다.

등에 진 배낭이 무겁다. 어깨에 진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무거운 짐. 피하고 싶은 숙제와도 같은 것. 짐은 힘으로 지는 게 아니라 균형으로 진다. 길 위의 인생,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결과는 모두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람이 길을 만들지만 길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나의 거울이자 선생이었다. 길가의 풀꽃 하나, 밤하늘 반짝이는 별, 길에 흘려놓은 ‘모렌토 모리 (Memento Mori)’ 같은 낙서 하나까지 나를 미지의 세계로 안내했다. 매일 새로운 선생님을 만났다.

2000리 순례길 마지막 날, 앙상한 가시만 남은 커다란 청새치 한 마리를 배낭에 걸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그때, 땡, 땡 성당의 종이 울렸다.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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