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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식당·상점서 허드렛일…50센트 팁에 설움 복받쳐

[LA중앙일보] 발행 2020/09/29 미주판 2면 기사입력 2020/09/28 20:38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3> 아버지·맏형 대신 가족 부양

찰스 김 농장서 두달간 500불
유학생협회 학생회장역 맡아
한국문화 행사로 1천불 모금

1955년에 &#39;한국 문화의 밤&#39;을 주최한 유학생들의 단체 사진. [사진제공 민병수 변호사]

1955년에 '한국 문화의 밤'을 주최한 유학생들의 단체 사진. [사진제공 민병수 변호사]

보건사회부 장관 정준모 박사(오른쪽)가 이문형 중앙각심학원장(왼쪽)에 행사로 모인 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제공 민병수 변호사]

보건사회부 장관 정준모 박사(오른쪽)가 이문형 중앙각심학원장(왼쪽)에 행사로 모인 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제공 민병수 변호사]

LA총영사관이 문을 연 지 1년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민희식 총영사는 1950년 7월 미 국방부의 요청을 받아 민간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전쟁을 지원한다.

당시 연합군이 추진하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민병수 변호사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해의 밀물 현상이나 파고 등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민 총영사는 국방부에서 3개월가량 근무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국무부에 민간고문으로 다시 한번 채용돼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브리지 역할을 했다. 그러다 1953년 한국으로 귀국해 한국주재 미 대사관 경제과에서 일하고 은퇴한다.

아버지가 총영사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민 변호사와 가족들의 생활은 그럭저럭 살 만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하자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다.

싼 렌트비를 찾아 여기저기 집을 옮겨 다녔다.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민 변호사의 큰 형(병화)은 시카고 의대에 입학해 멀리 살고 있었다. 둘째 아들인 민 변호사가 고스란히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유학생들 챙긴 독립운동가

학교는 휴학했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아시안 남학생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유색 인종이 백인과 마주치는 행동조차 금지되던 시절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민 변호사는 동네 그로서리 상점에서 물건을 배달하거나, 식당에서 그릇을 치우는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급사 일도 했다. 윌셔가와 뉴햄프셔에 있던 고급 백화점 아이매그닌(I. Magnin)에서 한번은 나이가 지긋한 백인 여성의 쇼핑백을 차에 실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민 변호사를 불러 세웠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장갑 낀 손으로 지갑에서 10센트짜리 다섯개를 꺼내더니 민 변호사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팁’이었다. 민 변호사는 “그 돈을 보는데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공손하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섰지만 ‘내가 이렇게 팁까지 받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됐나’ 싶어서 서글펐다”고 당시 심정을 털어놨다.

여름방학에는 중가주 프레즈노에 한인 김호씨가 운영하는 과수원에서 일했다. 농장주 김씨의 영어 이름은 찰스 H. 김. 2006년 LA 한인타운 내 공립학교에 한인 이름으로 처음 명명된 주인공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인 김씨는 당시 한국인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인이 개발한 ‘넥타린’으로 불리는 승도복숭아의 판매권을 양도받아 큰돈을 벌었다.

이 농장에는 매년 여름이 되면 유학생들이 찾아가 일을 했다. 당시 노동자의 임금은 시간당 75센트. 두 달 동안 농장의 막사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 평균 10시간 일하고 나면 500달러 정도를 벌어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사무직으로 옮겨 공부할 마음

지역 유지였지만 낡은 트럭을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했던 김씨는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쯤에는 격려금이자 장학금으로 많게는 1인당 1000달러씩 주기도 했다.

민 변호사는 좀 더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유학생들이 꺼리던 포도 따는 일까지 했다. 민 변호사는 “복숭아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익은 열매를 뚝뚝 따내는 거라 쉽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낮은 줄기 사이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열매를 따야 한다. 종일 땡볕에서 그렇게 10시간 동안 일하면 나중에는 다리가 펴지지도 않고 손도 마비가 왔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딴 포도 열매는 그 즉시 체에 펼쳐놓고 햇볕에 말린다. 당시 임금은 시간제가 아니라 ‘1체당’ 받기에 조금도 쉴 틈이 없다. 그렇게 말린 포도는 건포도로 재생산돼 전국에서 판매됐다.

그렇게 2년 가까이 막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던 민 변호사는 우연히 팀스피릿 노조 사무실에 사무직으로 취업이 되면서 육체노동을 면하게 된다. 민 변호사는 “안정적으로 수입이 들어오면서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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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무렵 한인사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민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당시 한국에서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과 그들의 자녀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전쟁고아였던 한국인 아이들이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되기도 했다.

유학길에 오른 학생들도 늘었다. 유학생과 연구원 중 상당수가 공부와 훈련을 마치고 미국에 정착했다. 1950년대 한국인 1만 5000명 정도가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국토안보부 이민통계 연보(yearbook of immigration statistics)에 따르면 1950~1959년까지 영주권 취득한 한인 수는 4845명이다.

1955년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 유학생협회 학생회장을 맡는다. 당시 한인 사회에는 교회 말고는 특별한 커뮤니티 공간이 없었다. 민 변호사는 처음으로 한국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미국사는 한인들을 결집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처음 음악회 형식으로 기획한 행사는 합창, 독창, 전통악기 연주회, 무용부터, 사랑에 빠져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까지 더해지며 규모가 커졌다. 전문 의상·분장팀까지 초청했다. 행사 날 400여 명의 한인이 몰렸다. 당시 입장료는 1인당 2달러 50센트.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0여 달러 정도로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한인들은 행사에 환호했다.

민 변호사는 그날 입장료로 모은 1000달러를 한국 고아원이던 ‘중앙각심학원’에 기부했다.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정준모 박사가 기부금을 전달받았다. 민 변호사는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죽을 때 다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뭐하러 쟁여두나.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이게 진짜 사는 재미 아니겠나”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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