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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하루아침에 불체자 신세…영주권 꿈 가물가물

[LA중앙일보] 발행 2020/10/01 미주판 6면 기사입력 2020/09/30 18:55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민병수 변호사
<4> 실패한 ‘민희식과 부인 및 자녀 구제안’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 [국가기록원, 홀트아동복지회 기증 기록물]

1950년대 홀트씨양자회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미국으로 이동하는 입양 대상 아동들. [국가기록원, 홀트아동복지회 기증 기록물]

윌리엄 노얼랜드 연방상원의원이 1955년과 1957년 두 차례에 걸쳐 의회에 상정한 민병수 변호사 가족 구제안. 안타깝게도 이 법안들은 회기 안에 진행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지미 이 제공]

윌리엄 노얼랜드 연방상원의원이 1955년과 1957년 두 차례에 걸쳐 의회에 상정한 민병수 변호사 가족 구제안. 안타깝게도 이 법안들은 회기 안에 진행되지 못해 자동 폐기됐다. [지미 이 제공]

부친 귀국후 체류신분 사라져
이민국은 걸핏하면 출두 요구

변호사 요구액만 엄청난 금액
상원의원 도와도 번번이 실패


아버지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생계도 문제였지만 가족들은 졸지에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이민국에서 온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민국 법원 출두 통지서였다. 외교관의 가족 자격으로 비자를 받고 입국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를 법원에 나와서 설명하라는 통지서였다. 하는 수 없이 가족들 모두 법원에 출두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민국의 문턱은 높았고, 직원들은 쌀쌀맞고 차가웠다.

민 변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들려줬다.

“한국은 전쟁으로 엉망이었다. 미국에 올 때 살던 집도 팔고 왔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살 곳도 없었다. 판사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했지만 우리 가족을 냉정하게 쳐다보며 ‘그건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더라.”

쌀쌀맞은 이민국과 줄다리기

그 때부터 이민국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합법적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LA다운타운에서 ‘일을 잘한다’고 소문난 미국인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했다. 그 변호사는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수수료로 1670달러를 요구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다. 돌이켜 보면 그 변호사의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수중엔 돈이 없었고, 포기해야 했다.

이민국에서는 툭하면 출두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 때마다 민 변호사는 가족 대표로 법원에 출두해 갖가지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답답한 마음에 예전에 아버지의 비서로 근무했던 백인 여성을 찾아가 이런저런 방법을 물어보니 LA다운타운에 법률도서관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길로 찾아가 이민법 관련 서적을 뒤졌다. 영어도 아직 완전히 구사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사전을 일일이 찾아가며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해야 했다.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길은 찾지 못했다. 그렇게 포기할 무렵,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이민법 조항을 발견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도 유효한 이 법은 특수상황을 참작해 영주권을 발급해주는 법으로, 연방 상원의원이 개인 법안을 상정해야 한다.

25불 주고 상원의원에 편지

마지막 길이라 생각하고 연방 상원의원에게 법을 상정해달라는 부탁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당시엔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서사무소가 있었다. LA다운타운에 있는 대서사무소를 찾아가 25달러를 지불하고 대필을 부탁했다. 25달러도 민 변호사에겐 큰돈이었지만 변호사가 요구한 거액의 수속비용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수신인은 당시 캘리포니아주 연방상원의원인 윌리엄 노울랜드(William Knowland·1908- 1974). 다수당이던 공화당 원내 대표로 영향력이 막강했던 정치인이다.

민 변호사는 대서 직원이 타이핑한 편지를 들고 무작정 오클랜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보좌관에게 편지를 의원에게 전해달라고 사정했다. 절실한 마음이 통했던지 보좌관은 “기다리라”고 하고는 민 변호사를 돌려보냈다.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일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연락이 없다면 한국으로 추방되는 길만 남았다. 그는 호텔 방으로 돌아와 무작정 기다렸다.

호텔 창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따르릉”하고 전화가 울렸다.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상원의원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그는 노울랜드 의원이 편지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노울랜드 상원의원은 약속대로 민 변호사의 체류 신분을 구제하는 법안을 1955년 상정한다. 법안 이름은 ‘민희식과 부인 및 자녀들 구제안((S. 1140·사진)’이다. 일반적으로 연방 상원의원들이 상정하는 개인 구제 법안들은 의회에서 그냥 통과됐다.

하지만 당시 노울랜드 의원과 정치적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던 웨스트버지니아주 연방상원의원인 할리 킬고어(1893-1956)가 사사건건 딴지를 걸던 시기였다. 킬고어는 법안 스케줄을 보류시켰고 의회 회기가 마감되면서 법안은 자동으로 폐기됐다.

민 변호사는 “노울랜드 의원 사무실에서 그해 말 편지를 보내 법안이 폐기됐다고 알려줬다. 그때의 좌절감은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노울랜드 의원은 내년에 법안을 다시 상정하겠다고 어린 민 변호사에게 약속했다. 노울랜드 의원은 약속대로 1957년 다시 법안(S. 614)을 상정시켜 법사위원회를 통과하고 하원으로 넘어가면서 통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하지만 하원에서 법안 처리를 미루면서 또다시 폐기됐다. 지금도 이 법안은 워싱턴 도서관에 원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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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고아가 입양되던 시절

민 변호사가 영주권을 받은 1950년대는 전쟁통에 생겨난 고아들의 미국 입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던 시기였다. 1954년 한국 정부는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버려진 혼혈아동들을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아동양호회'를 설립했다. 정전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약 8000명의 아이가 미국 기독교 가정에 입양됐다.

민 변호사의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줬던 윌리엄 노울랜드 연방 상원의원은 1945년부터 1959년까지 가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오클랜드 트리뷴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기도 해 지역에서도 유지로 꼽혔다.

노울랜드 의원은 외교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 냉전 후 국가 외교정책 우선순위와 자금지원, 특히 한국을 비롯한 베트남, 포모사, 중국, 나토(NATO)에 관한 외교정책 마련에 기여했다.

외교정책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만큼 노울랜드 상원의원은 한국을 잘 이해했다. 또한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가주 내 한인 커뮤니티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그렇기에 민 변호사의 사정도 쉽게 이해했다.

1958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후 아버지 조셉 R. 노울랜드 뒤를 이어 오클랜드 트리뷴의 편집장이자 발행인이 된 그는 나중에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만큼 정치인으로서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은 불우했다. 마지막에는 도박으로 90만 달러가 넘는 돈을 탕진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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